<8>'동학의 도시' 전북 정읍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전북 정읍은 ‘동학의 도시’이다. 동학혁명이 시작된 고부 만석보 유적으로부터 황산벌 전적비, 동학혁명기념관, 전봉준 공원, 전봉준장군 고택 등 수많은 동학의 유적들, 특히 크고 웅장한 기념물들이 많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알려지지 않아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다. 고부면 신종리에는 전봉준, 김개남 등이 처음 동학혁명을 모의하고 사발통문을 보낸 것을 기념한 ‘동학혁명모의탑’이 있다.
여기에서 마을 쪽으로 들어가면 마을회관 앞에 이 탑이 자리잡고 있다. 많은 동학기념물들이 전봉준 등 동학의 지도자들을 기리고 있지만, 이 탑에는 나라를 지키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죽창을 들었다가 죽어간, 30만~50만 명(당시 인구 1,500만 명의 2~3%)으로 추정되는, 이름 없는 민초들의 분노와 함성, 그리고 한과 슬픔이 서려있다.
구한말 서구제국주의가 쳐들어오면서, 우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이에 대한 대응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대원군과 지배계급이었던 양반과 유림들이 취했던 위정척사운동, 그 뒤를 이은 의병운동이다. 이는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점에서 ‘자주적’이었는지 모르지만, 낡은 봉건제, 신분제 등을 지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복고적’, ‘정체적’,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시대착오적‘, ’퇴행적‘이었다.
또 다른 흐름은 김옥균 등 개화파다. 이들은 신분제 폐지 등 세계적인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려 했다는 점에서 ‘개혁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를 일본의 힘을 빌려 이루려고 하는 등 ‘외세의존적’이었다. 이 두 흐름이 당시 ‘엘리트 지배계급’의 반응이었다면, 세 번째 흐름은 밑으로부터 일어난 ‘민중들의 운동’으로,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이들은 척화파만큼, 아니 척화파보다도 더 자주적이었고, 개혁성이라는 면에서는 한계는 있었지만, 개화파만큼, 그리고 어느 면(농지개혁, 여성권리 등)에서는 개화파 이상으로, 개혁적이었다.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것은, 자세히 따져보면, 동학의 요구사항이 ‘동학혁명’이라고 부를 만큼 ‘혁명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혁명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급진적 개혁안’이다. 요구조건의 마지막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는 폐정개혁안 12조를 살펴보면, 토지 균등분배, 노비해방, 과부재혼 허가 등 급진적 내용도 있지만 봉건제의 핵심인 양반 상놈의 신분제의 폐지나 왕정의 폐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그리고 ‘불량한 유림과 양반 못된 버릇 징계’라는 온건한 개혁안 수준이다. 하지만 고종을 비롯한 조선왕조와 양반 등 지배계급은 그것조차도 수용할 수 없었다.
역사상 중요한 모든 사건이 그러하듯이, 동학혁명도 심층적인 ‘구조적 요인’과 촉발을 일으킨 ‘사건사적 요인’이 작동했다. 동학혁명의 심층적인 요인이 살인적인 농민수탈과 신분제라는 봉건제의 모순이라면, 촉발시킨 것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의 만석보 물세다. 정읍에서 북쪽으로 달려가니, 동진천이란 작은 천이 나타났다. 이 천을 건너 동진천과 배들평야가 내려다보이는 강둑에 서자, ‘만석보 유적지’라는 표시판이 나를 맞았다.
이곳이 동학혁명을 촉발시킨 곳이다. 여기에 저수지가 이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병갑은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쌓고 농민들에게 물세를 강제징수했다. 동네훈장인 전봉준의 아버지가 이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을 전하러 관아를 찾아갔다가 곤장을 맞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분개한 전봉준, 김개남 등이 관아를 습격했고 조병갑은 도주했다.
전봉준 등은 만석보를 허물고 관아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새로 군수로 부임한 안길수는 농민들이 부분적으로 파괴한 만석보를 완전히 해체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농민들이 세운 ‘안길수만석보혁파선정비’를 보면 만석보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와 한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농민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듯 했던 중앙정부가 동학신도들과 농민들을 마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전봉준 등 지도부는 대접주 손화중이 있는 무장읍으로 도피해 농민군을 조직해 봉기했다(무장기포). 동학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놀란 중앙정부는 배편으로 군산 등에 진압군을 급파했지만 동학군은 이를 격퇴했다.
장성 황룡에 가면 죽창모양의 승전탑을 볼 수 있는데, 신식양총으로 무장한 정예부대를 동학군은 대나무를 쪼개 타원형으로 만들어 짚과 칼 등을 넣은 장태라는 무기를 만들어 굴리는 전술로 승리할 수 있었다. 100여정의 신식총까지 노획한 동학군은 그 여세를 몰아 호남의 중심인 전주성을 장악했다.
놀란 고종은 청나라에 군대파병을 요청했고 이에 텐진조약을 내세워 일본도 군대를 파견했다. 국내문제 때문에 외세가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농민군은 정부와 신분보장, 그리고 그간의 잘못된 정책 개혁에 합의하고 해산했다. 농민군은 이 전주화약에 의해 전주에서 철수했지만 전라도 전역에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운영했다.
공식적인 지방정부는 존재했지만, 집강소가 사실상의 실질적인 정부역할을 했다. 집강소는 ‘한국 근대민주주의의 효시’이자 민중권력의 초기형태인 ‘한국판 코뮌’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혁명은 기본적으로 농민혁명이지만,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하늘이다)이라는 인본주의 평등사상과 조직적 기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는 일본에게 철군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오히려 경복궁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조선에게 청나라를 완전히 몰아낼 작정으로 청일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동학군은 일본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는 대원군에 밀지(일본군이 동학군을 유도, 섬멸하기 위해 대원군의 밀지를 가장한 것이라는 설도 있음) 등에 의해 2차 봉기에 나섰지만,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이 가져온 최신식 독일제 기관총 앞에서 죽창을 든 농민군은 맥없이 쓰러졌다.
이로써 ‘자생적인 근대화’의 길은 완전히 실패하고, 우리는 식민지의 길로 갈 수밖에 없게 됐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동학에 참여한 수많은 민초들이 단순히 일본군이 아니라 우리 정부의 관군과 ‘양반군’ 그리고 일본군의 연합에 의해 처참하게 쓰러졌다는 사실이다.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앞에 서서 120년 전 꽃잎처럼 쓰러져 간 수많은 농민들의 혼을 생각하고 있자, 문득 탄핵은 당했지만 박근혜가 그래도 ‘괜찮은’ 지도자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최소한 박근혜는 민중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났을 때, 자신이 살려고 미국에게 군대를 출병해 민중들을 박살내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종은 정확히 그런 짓을 했다. 민중들이 자신의 압정에 분노해 죽창을 들고 일어나자, “농민들의 죄는 용서받기 어려우나 우리 백성들의 일이며 그들이 봉기한 원인이 지방관의 수탈로 일어난 것이오니...만일 청국군의 지원받아 토벌하면 우리나라 국가운영의 치부를 다른나라에 드러내는 것이니 더할 수 없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김병시 등 여러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고종은 처가인 민씨 일가들의 지원아래 청나라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청나라군이 출동하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일본도 텐진조약을 근거로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했다. 고종은, 조선왕조는, 자신들이 살자고 외국군대를 끌어들여 백성들을 살육하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나라를 일본에게 가져다 바치고 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를 ‘최악의 왕’이라고 생각하지만, 고종에 비하면 그래도 선조는 양반이다. 선조가 명나라군을 끌어들인 것은 왜군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 자신들의 백성들을 살육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최근들어 ‘민족주의적’인 국사학자들이 고종이 파병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등 고종 재평가, ‘고종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그것은 의미있는 중요한 작업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최소한 파병논쟁에 관한 한, 이에 대한 논쟁을 읽어 보면 고종 살리기는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사실 그는 이미 임오군란 때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고 아관파천 때는 아예 러시아공사관으로 궁을 옮기기까지 했다. 임진왜란 당시에 선조, 구한말에 고종, 12ㆍ12와 광주학살 당시에 최규하와 같이 역사적 고비마다 무능하고 한심한 지도자를 만난 우리는 참 복이 없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