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청년들이 말하는 '공정'이란
정치권은 공정을 정쟁거리로 전락시켜
보여주기 정책으론 사태 본질 이해 못해
"기계적 공정보다 다름 인정하는 게 우선"
"특혜 원치 않지만 노력의 대가 보장돼야"
편집자주
이슈와 화젯거리를 이야기할 때 기성세대는 자주 핏대를 세웁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밀레니얼 세대는 의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견 표출의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한국일보 인턴기자들이 기성세대와는 다른 밀레니얼의 시각을 담아 한국 사회를 ‘언박싱’ 해보겠습니다. 밀레니얼의 솔직한 체감지수를 느껴 보세요.
지난해 말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2020년 신년기획 여론조사'에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묻는 질문에 '공정'이 1위로 꼽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근 그토록 원하던 공정이란 가치가 훼손되는 장면을 끊임없이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고위 공직자 자녀의 특혜 문제,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논란 등 1년 내내 공정과 관련한 논쟁이 뜨거웠습니다. 정치권과 언론은 문제가 터질 때마다 공정에 예민한 청년 세대가 분노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가뜩이나 살기 팍팍한 청년들에게 아주 작은 불공정도 큰 좌절감을 안길 수 있다고 말이죠. 이를 의식해서인지 문재인 대통령도 최근 '제1회 청년의 날' 기념사에서 ‘공정’이라는 단어를 무려 37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맞습니다. 공정 사회 구현은 당연한 명제입니다. 하지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공정을 외치는 것을 보면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는 아직 그렇게 공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공정’이 우리 세대의 화두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치권과 언론의 말대로 정말 청년들은 공정을 다른 세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까요. 끝없는 공정 논란을 보며 청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공정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를 말하는 것인지. 밀레니얼이 생각하는 ‘공정’을 언박싱 해봅니다.
핵심을 피해가는 ‘공정성’ 논란
티나: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병역 관련 의혹이 결국 검찰에서 무혐의 처리됐어. 추 장관 아들과 관련한 이런저런 의혹들이 보도됐지만, 법적으론 처벌할만한 사안은 아니라는 거잖아. 아들의 '게임 등급'까지 보도될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컸는데, 어이 없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해. 군 복무하면서 그렇게 높은 등급까지 올라갔냐고 문제 제기하는 건 너무 핵심에서 벗어난 거 아닌가. ‘공정’ 관련 이슈를 사람들이 입맛에 맞게 선택하는 것 같아.
줌으로 공부함(줌공): 그래도 이번 추 장관 아들 논란이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 논란을 특혜냐 아니냐로 물으면 특혜에 가깝다고 봐. 그런데 그 해프닝을 가지고 우리나라 전체의 공정성을 논할 건 아니야. 정치권과 언론에서 얘기하는 게 굉장히 미시적이잖아. 게임 등급이 뭐냐부터 무릎이 아픈데 스포츠 인턴십을 할 수 있느냐까지, 그런 논의만으로 한국에서 불공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냐는 거지. 정치권은 이걸 해결하기보다 정쟁으로만 활용하고 언론보도도 자극적인 곁가지만 훑고 있어. 애초에 깊이 있는 얘기가 나오기 힘든 지형 같아.
티나: 조국 전 장관의 자녀 입시비리 논란이 커지니까 갑자기 대학입시에서 정시를 확대한 것도 그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잖아.
양꼬치엔 닭꼬치(양닭): 조국 사태 관련해 제일 화났던 부분은 성적 우수 장학금이 사라진 거야. 장학금 제도에 문제가 있으면 해당 장학금을 손보면 되는 것이지,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받을 수 있는 장학금 자체를 왜 없애버리는 건지.
귀한곳에 누추한분(귀누): 우리 학교는 성적 우수 장학금이 없어진 지 4년 정도 됐어. 반발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성적으로 학생을 평가하기보다는 생계가 어려운 학생들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해. 그런데 우리가 보기엔 왜 하필 그런 커다란 사건이 있고 난 뒤에야 변화가 생기냐는 거지.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 보안검색직 직원들을 정규직화한 것도 불공정하다는 말이 많았잖아.
줌공: 사람들이 불공정하다고 느꼈던 건, 정규직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정당하게 시험 보고 노력해서 들어간 건데, 정규직화 대상자들은 별도 절차 없이 그냥 정규직으로 해줬다는 거지.
양닭: 맞아. 정부의 보여주기식 정책 같아서 답답해. 충분한 논의를 거쳐서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계획을 세운 게 아니었잖아. 정부 기조에 맞추려고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화 해버리는 바람에 논란이 더 커진 건 아닐까.
티나: 나는 시점을 문제 삼는 것엔 동의 안해. 인국공 문제는 지금 터졌지만, 애초에 문재인 대통령이 인국공 방문해서 비정규직 정규직화하겠다고 공언한 건 2017년이었잖아. 공약을 지키려고 한 건데, 시점을 문제 삼으면 불공정을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이 인위적인 것 아닌가.
줌공: 그래도 정부가 미숙했던 건 분명해 보여. 절차나 숙의 하에 이뤄진 게 아니라 대통령이 연설하러 간 직후에 정책이 발표됐잖아.
귀누: 인국공이 꿈의 직장이고, 지원하려면 엄청난 스펙이 있어야 하니까 이슈가 된 측면도 있어. 실제로 인국공 지원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그 사태를 지켜보면서 화를 냈잖아. 취업이 청년들에게 얼마나 예민한 문제인지 보여준 사건 같아.
티나: 언론이나 정치권은 뭉뚱그려서 ‘청년이 특히 공정에 민감하다’고 표현하잖아. 근데 애초에 취업은 계속 불공정하지 않았나. 금융권 공채에서 성차별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지금까지의 차별은 다 놔두고 역차별에만 불만을 느끼고,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 생각해.
왜 지금 공정성에 특히 민감해진 걸까
줌공: 공정성이 지금 화두가 된 이유는 갈수록 부모 재산과 지위 같은 외적 조건이 스스로의 노력보다 내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야. 능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잖아. 그렇다고 외적 조건에 따라 자기 삶이 좌우된다고 인정해버리면 내 삶이 너무 초라해지잖아. 스펙 쌓으면 좋은 일자리가 보장된다고 믿어야 그나마 버틸 수 있는 거 아닐까.
귀누: 기회균등은 표면적으론 실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 가난해도 고등교육 받을 수 있고 장학금도 주는데 뭐가 불평등하냐는 거지. 그런데 기회가 균등하면 절차도 똑같이 밟아야 하는데, 기본적인 것도 안 지켜지고 있잖아. 그러니까 열 받는 거지.
줌공: 그래도 외적 조건이 영향을 미치는 건 어쩔 수 없어. 예를 들어 내 친구랑 나랑 둘 다 수능성적이 안 좋았거든. 나는 재수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는 집에 여력이 없어서 재수를 못 했어. 외적 조건이 받쳐 주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 다니는 대학을 절대 못 갔을 거야.
티나: 그런 걸 보면 공정 이슈와 관련해선, 청년들은 차별보다 역차별에 더 민감한 것 같기도 해.
펭수야 사랑해(펭사): 맞아. X세대(베이비붐 세대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 태어난 세대)보다 밀레니얼 세대가 훨씬 더 비슷한 그룹끼리 뭉치다 보니 그런 것 같아. 밀레니얼은 X세대가 만들어놓은 터전을 기반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더더욱 비슷한 사람들끼리 몰려 다니잖아. 출신학교에 따라서, 사는 동네에 따라서 동질한 그룹이 생기다 보니, 내가 속한 그룹과 차이가 나는 사람들이 더 눈에 띄는 거 아닐까.
귀누: 역차별이란 주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누구나 개인의 문제가 사회 문제보다 크다고 느끼니까.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성과를 냈는데, 누구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나랑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기분이 좋진 않겠지.
‘청년’을 내세워 대리 분노하는 언론과 정치권
귀누: 인국공 논란 때 정부가 청년들에게 가짜뉴스에 휘둘리지 말라거나, '보안검색 요원은 청년들이 선호하는 일자리 아니니까 정규직화해도 상관없다'라는 식의 이야기까지 했잖아. 그런데 청원경찰을 정규직화하면서 경쟁률이 10대1까지 치솟는 등 어마어마하게 인기를 끌었어. 정부가 논란을 업종문제가 아니라 정규직에 대한 바람으로 해석해야 했는데, 여전히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양닭: 정치권에선 공정이란 단어를 이야기하면서 본질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상대방 흠집 내는데 이용하고, 언론은 깊이 파헤쳐서 보도하기보다는 도리어 싸움을 부추기는 것 같아. 공정이란 말은 흔해졌는데, 공정성을 바라는 간절한 목소리는 정치권이나 언론 어디에도 제대로 담겨 있지 않아.
티나: 청년은 그 과정에서 그냥 명분이 되는 느낌이야. 본인들이 화내고 싶은 걸 청년들이 화내고 있다고 대리 분노시키는 것 같아.
분갈: 추 장관 아들의 휴가 문제도 분노를 느낄 문제가 맞긴 한데 사람한테는 분노의 총량이란 게 있잖아. 청년들에게 이제 더 이상은 이런 문제에 분노할 에너지가 없어. 비슷한 일들이 너무 많고 당장 내가 취업준비 하기 바쁘니까. 국회의원들이 정말 청년을 위한다면 제데로된 취업 정책을 내놓거나 일자리를 창출할 만한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힘써야지. 이 문제만 계속 파는 건 청년들한테 실질적인 도움이 안돼.
티나: 청년들의 분노는 한편으론 분노보다 불안에 가까워 보여. 내가 공항공사 준비 중이고, 그게 내 취업길이고, 그 줄의 맨 마지막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겠어.
펭사: 입법자들은 그 줄의 머리에 있다 보니까 청년들의 이런 심리를 잘 이해 못 하는 것 같아. 공항 바닥에 붙은 껌 떼는 일이라도 정규직으로 뽑으면 수천 명은 몰릴 거라는 말도 있어. 그만큼 청년들은 절박한 거지.
티나: 불안해서 정치권에 분노하는 건 자연스러운데, 가끔은 그 분노가 똑같은 약자인 주변 청년들에게 고스란히 향한다는 거야. 그때부터는 분노가 아니라 혐오로 변하잖아. '나는 명문대 나와서 열심히 취업 준비하는데 왜 지방대 출신이 정규직을 하고 있냐'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면 분명한 혐오잖아.
‘공정사회’ 구현을 위해 꼭 필요한 변화
줌공: 공정사회를 만드는데 제일 필요한 건 ‘인지’라고 생각해.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온 타인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해의 폭이 넓어지잖아. 기계적 공정이 정답은 아니라는 거지. ‘노력만 하면 되는 일인데 쟤네는 노력을 안 하네’라고 생각하니까 해결점이 안 보이는 거지. 노력해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울타리 밖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걸 통해서 자기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귀누: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공적인 감정'도 느껴야 해. 사람들이 차별을 인식하는 건 이질성이 아니라 동질성을 통해서라고 하잖아. ‘쟤랑 나랑 똑같은 사람인데 왜 나는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까’ 이런 감정이지.
티나: 그런데 문화를 통한 간접 경험은 한계가 있을 것 같아. 공정을 실현하려면 결국 당사자가 나서서 바꿔야 해. 국회에서 아무리 소수자 정책, 청년 정책 이야기해도 거기에 소수자나 청년은 거의 없잖아. 국회의원도 대부분 50,60대 고학력 남성 의원이고. 공정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청년이랑 소수자가 더 많이 늘어야 해.
양닭: 난 시간의 힘을 믿어. 이런 논의가 더 많아져서 끊임없이 목소리가 나오면 분명 사회는 바뀔 거야. 국회에 청년, 소수자가 지금보다 더 많아진다면 그 사람들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더 멀리 뻗을 수 있을 거야. 이번에 더불어민주당 지명직 최고위원이 된 박성민 전 청년대변인이 인터뷰한 걸 봤는데 당에서 청년의원들이 목소리를 제대로 못 낸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계속 힘을 실어주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
펭사: 어떤 정당이든 청년 당원들이 없진 않지. 그런데 기성세대는 영입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만을 수용해 줬다고 느끼는 것 같아. 발언권이나 입법기회를 충분히 줘야 진짜로 의견을 반영하는 거잖아. 대학 입시만 하더라도, 지금 교육제도에서 어느 정도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기회균등 전형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오히려 불공정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잖아. 그러니 입장에 다른 사람들이 마주앉아서, 서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분갈: 공정사회 구현을 위해선 부정 청탁이나 부정 채용에 대해 제도적으로 처벌 수위를 높일 필요도 있어. 청년 정치인 비율도 강제로 높이고. 필요성은 인정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실천이 안 되잖아. 가끔은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봐.
정리=장수현 인턴기자
참여=김단비, 노지운, 왕나경, 이인서, 장채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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