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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부터 돈 달라던 부모, 남편한테도 손 벌리는데...

입력
2020.09.28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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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20년 가까이 생활비를 요구하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워요. 부모님은 제가 다섯 살 때 이혼하셨다가 2년 뒤 재결합했습니다. 그 무렵 남동생이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만 집안은 어려웠습니다. 아버지의 이직과 실직이 반복됐고, 도박빚은 늘어갔습니다. 어머니가 일을 했지만 역부족이셨어요. 학창시절 돈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부모님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그 와중에도 부모님은 동생을 우선했습니다. 제가 원한 건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 정도였는데 늘 동생만 챙기셨어요. 제가 고등학생일 때 어머니는 아버지 외도 문제를 제게 얘기했어요. 왜 제게 그런 얘기를 하셨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이혼했을 때부터 제게 한풀이를 했던 것 같아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대학생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 부모님은 제게 생활비를 요구했습니다. 회사생활을 시작하고 월급을 떼일 때도 돈을 달라는 말부터 했습니다. 다행히 좋은 사람 만나 6년 전에 결혼했지만, 그 때도 부모님은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셨어요.

결혼했으니 이제 더 이상 돈 달라는 얘기는 없겠지 했는데, 여전히 돈을 요구합니다. 카드값이며 생활비까지 필요할 때마다 전화합니다. 아버지는 남편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돈을 빌려 도박을 합니다. 어머니는 알면서도 그저 ‘나도 어쩔 수 없다. 미안하다’고만 합니다. 남편은 그래도 사위라고 없는 살림에 용돈을 드립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저희에게 그저 돈 모아 큰 집 사라고 닦달할 뿐입니다.

부모님은 저보다 돈을 더 잘 버는 동생에게는 돈 달라고 하지 않으세요. 어느 날 이제 돈 얘기는 동생에게 하세요 했더니 ‘걔한테 어떻게 그러니’라 했습니다. 그 말 뒤 너무 화가 나 이제 연락을 끊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남편과 이모를 통해 계속 돈을 요구합니다. 부모에게 저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이민정(가명ㆍ39ㆍ회사원)


민정씨, 모든 사람이 부모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자식이지요. 딸이었고 미래의 엄마일 수 있는 민정씨와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요. 부모는 자녀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우선 자녀에게 심리적 안정을 주어야 하지요. 그래야 아이 마음이 편안하지요. 부모는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줘야 해요. 나무에게 물이 필요하듯이 신체적, 정서적 보호뿐 아니라 배우고 싶은 걸 가르쳐주고, 먹는 것을 잘 챙겨주는 것 등을 해야 합니다.

민정씨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 밑에서 힘들고 고달픈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심리적 안정을 느껴본 경험이 거의 없고 기본적인 보살핌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오히려 어머니 마음과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부터 돌봐야 했지요.

저는 당신이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한 건 아니었지만 늘 뒷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 해도 당신이 부모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못 받았다고 느꼈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의 중요한 숙제가 됩니다. 부모와의 경험을 돌아보며 속상하고 고통스러웠던 일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고 깊이 생각해보고 되풀이되지 않도록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민정씨 유년 시절은 불안했을 거예요. 다섯 살 때 부모가 이혼한다는 건 아이로서는 굉장히 두렵고 불안한 일입니다. 한 사람을 따라가야 하고, 그 사람마저 나를 버리면 어떡하냐는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2년 뒤 재결합 때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때 동생이 태어나 민정씨는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기 어려웠을 거고, 부모도 당신에게 오롯이 신경쓰지 못했을 테니까요.

더 큰 문제는 사랑을 줘야 할 부모가 당신에게 끊임없이 경제적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게다가 동생에게는 그런 요구를 하지 않으니 당신이 얼마나 억울하고 불공평하다 느꼈을까요. 불공평하다는 억울함은 어렸을 적 과거로까지 고스란히 이어졌을 거예요. 현재만으로도 억울한데, 되돌아보니 당신 인생은 부모의 끊임없는 요구에 응하는 것이었다고 느꼈을 거예요.

부모와 연락을 끊은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왈가왈부하겠지만 저는 그 어떤 사람도 당신에게 감히 그런 얘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아마 20년 가까이 오랜 세월 끊임없이 고민한 끝에 그런 결정을 내렸을 거예요. 저는 당신이 심사숙고한 그 결정을 깊이 존중하고 최선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 내면엔 여전히 상처와 갈등이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려면 부모를 한 인간으로서 파악해야 합니다.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사람을 따로 떼어 놓고 마음의 거리를 안전하게 유지하면서 파악해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은 매우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섣불리 그들을 이해하거나 용서하자는 게 아니라 민정씨가 그들에게 느끼는 깊은 감정에서 한발 물러나서 한 인간으로서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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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치료가 필요한 분이에요. 도박은 질병입니다. 도박은 중독 질환이어서 돈만 생기면, 틈만 나면 도박해야 합니다. 도박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변명과 거짓말까지도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딸을 사랑해도 도박에 관한 한 딸을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누구를 더 사랑하고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어머니는 딸 같은 엄마였을 거예요. 반대로 딸인 당신이 오히려 엄마였을 겁니다. 도박하는 남편에게 무얼 기대했을까요. 어머니가 재결합한 것도 추측컨데 마음이 약해서일 거이예요. 섬세하고 정에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중요한 상황에 결정을 하기 어려워하고 마음만 앞서는 걸 의미해요. 결단이 필요할 때도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아들은 굉장히 복잡한 의미였을 거예요. 남편과 이어준 끈이면서, 동시에 아들이 없었다면 남편과 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 좋지만 불편한 존재이지 않을까요. 어머니에게 아들은 어려운 상대일 거예요. 반대로 민정씨는 편안한, 엄마 같은 딸이었어요. 편한 사람에게 힘든 얘기도 하고, 돈 얘기도 하는 겁니다.

두 사람 관계는 어머니와 딸의 위치가 바뀐 거예요. 어머니는 깊고 따뜻한 사랑을 주는 부모로서 손을 내미는 게 아니라 아이처럼 자식한테 손을 벌리는 거예요. 꼭 경제적 문제가 아니어도 진심으로 ‘부모로서 도움을 줘야 하는데, 이렇게 돼 미안하다’란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 최소한의 부모 역할도 못하고 있어요.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는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 숙여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딸의 마음에 난 구멍, 뿌리가 견고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과 고통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에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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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씨 또한 어머니의 손을 자꾸 잡으려 했을 거예요.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려던 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어렸을 적 부모로부터 심리적 안정감, 사랑과 관심,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한 데 따른 결핍을, 어머니 손을 잡아서라도 채우고 싶었겠지요. 남들은 ‘그런 어머니한테 사랑 받는 게 뭐가 중요해’라 말하겠지만, 부모의 사랑은 마음의 뿌리와도 같아요. 당신은 흔들리는 마음의 뿌리를 단단히 부여잡기 위해서라도 부모의 무리한 요구를 계속 들어줬을 겁니다. 민정씨는 연락을 끊었다 해도 마음이 계속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저는 당신이 겪은 갈등과 고통이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얘기를, 안타까움을 담아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어요.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 뭐든 잘 이겨내는 존재가 아니에요. 누구나 어려움은 있고, 그걸 겪어내는 과정이 중요해요. 민정씨도 가족의 갈등을 통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고, 어머니를 부모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어떤 미성숙함이 있는지 파악하고, 도박이란 질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떨어트려놓고 인지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걸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너무나 오랜 시간, 최선을 다해 잘 버텼어요. 이제 부모와 연락을 끊어도, 돕지 않아도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당신은 아이 같은 친정엄마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면, 그 손을 이제는 당신이 사랑하는 배우자의, 미래에 있을지 모르는 아이의 손을 위해 남겨놓으세요. 당신에게 묵묵히 나눌 줄 알고, 가족을 챙길 줄 아는 남편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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