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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말을 줄입시다

입력
2020.10.05 15:14
수정
2020.10.05 18:23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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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차현진한국은행 연구조정역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플란다스의 개'는 봉준호 감독의 데뷔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같은 제목의 동화가 훨씬 유명하다. 아주 슬프다. 주인공 소년 네로와 그의 개 파트라슈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춥고 깜깜한 대성당 안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얼어 죽는 것으로 끝난다.

그 동화의 무대인 플랜더스(Flanders)는 네덜란드어를 쓰는 벨기에의 북부 지역을 말한다. 하지만 벨기에의 남부는 프랑스어를 쓰고, 동부는 독일어를 쓴다. 경상도 크기의 작은 나라에서 세 개 언어나 쓰는 것은 기구한 역사 탓이다.

벨기에는 스페인, 오스트리아, 프랑스, 네덜란드에 차례로 지배를 받다가 1830년 독립했다. 그 독립을 자력으로 얻은 것도 아니다.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힘이 너무 커지자 프랑스와 영국이 네덜란드를 견제하려고 담합한 결과다.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이 네덜란드에서 독립하면, 프랑스의 우방국이 하나 늘어난다. 네덜란드의 분열은 영국의 해상무역에 유리하다. 이런 계산을 하며 영국을 끌어들여 벨기에를 독립시킨 사람이 탈레랑이다.

프랑스의 외교관 탈레랑은 아주 영악한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나폴레옹의 부하였지만, 실상은 그가 나폴레옹을 이용했다. 탈레랑은 극심한 정치 격변기에도 변신과 줄타기를 잘해서 외무장관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탈레랑은 겉과 속이 다른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어록 중에는 “말은 생각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있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는 영국의 문필가 칼라일은 탈레랑에 비하면 어린애에 불과하다.

그래도 칼라일의 말을 실천한 사람이 있다. 몬터규 노먼은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 총재직을 24년 동안이나 지켰던 전설의 금융가인데, 그는 “설명도, 변명도 하지 않는다(No Explanation, No Excuse)”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처칠 수상의 경제정책이 마뜩잖으면, 한 달씩 출근을 하지 않고 대화를 끊었다. 결국 처칠이 양보했다. 노먼에게 침묵은 금을 넘어 무기였다.

노먼의 ‘묵언수행’은 근 70년 동안 모든 중앙은행 총재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들은 웬만해서는 대중 앞에서 나서지 않는 신비주의를 따랐다. 그 전통을 깨뜨린 사람이 미 연준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이다. 그의 아내는 유명한 방송인이었다.

그린스펀은 언론에 모습을 보일 때 항상 현학적이고 모호했다. “당신은 내말을 이해했다고 믿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당신이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이라고 핀잔을 줄 정도였다.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주장한 ‘건설적 모호성(constructive ambiguity)’에서 영감을 얻은 탓이다. 키신저는 뉴욕 맨해튼 북쪽 유대인 촌에서 함께 자란 고등학교 선배였다.

같은 유대계지만, 벤 버냉키 후임 의장은 좀 달랐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금융시장 불안이 계속되자 금리 인상의 전제 조건들과 예상 시기를 수치로써 미리 예고했다. 이를 포워드가이던스(forward guidance)라고 한다. 침묵을 중시하던 몬터규 노먼과는 정반대의 접근이다.

그런데 한 달 전 제롬 파월 현 의장이 포워드가이던스를 폐기했다. 인플레이션이 목표 수준인 2%에 도달하더라도 당장 금리를 인상하지 않는다는, 소위 ‘유연한 평균물가목표방식’으로 전환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2% 이하의 인플레이션도 좋고 그 이상도 좋다는 것이다. 황희 정승식이다.

파월 의장이 포워드가이던스를 폐기한 이유는, 인플레이션을 당장 2% 수준까지 끌어올릴 묘책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속마음을 ‘유연한 평균물가목표방식’으로 포장한 것은 탈레랑의 감언이설과 다르지 않다. 솔직함이 없는 장황설은 신뢰를 떨어뜨린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만큼이나 디테일로 유명하다. 그 영화 주인공은 지구 밖에서 동료에게 고백한다. 일종의 복선이다. “우리 90%만 솔직합시다. 감정을 가진 인간이 100% 솔직하면 사귀는데 도움이 안 되고, 안전하지도 않죠.”

지구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SNS의 글과 실제가 다르면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 칼라일이 옳았다. 침묵이 금이다. 우리 10%만 말을 줄입시다.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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