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로마에서 잠적한 조성길 전 주이탈리아 북한 대사대리의 한국행은 북한 지도부에게 당혹할 만한 뉴스다. 더구나 북한은 10일 대규모 축제인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있다. ‘공무원 피격 사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사과를 높이 평가하며 남북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던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다. 조 전 대사대리가 지난해 7월 귀순해 국내에 체류 중인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던 정부는 이번 사태가 남북 관계에 악재가 되지 않을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그러나 조 전 대사대리의 망명이 남북 관계에 미치는 파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1997년, 2016년에 각각 귀순한 황장엽 노동당 대남비서,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였던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급에 미치지 못하는 데다 그가 공개적으로 북한 체제 비판에 나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 공개 비판한 황장엽ㆍ태영호와 달라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조 전 대사대리는 1등 서기관으로 태영호 공사보다 급이 높지 않은데다 이탈리아는 영국, 스위스와 달리 북한 입장에서 중요도가 떨어지는 국가”라며 “김씨 일가의 사치품을 조달했던 조 전 대사대리가 고급 정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조 전 대사대리가 남북 관계를 좌지우지할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는 2017년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을 이유로 이탈리아 정부가 문정남 당시 주이탈리아 북한 대사를 추방하자 1등 서기관 신분으로 대사직을 수행했다. 외교관 직급은 서기관→참사관→영사→공사→대사로 이어진다.
조 전 대사대리는 현재까지 잠행하는 것도 북한의 대응 수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공개석상에서 수차례 북한 체제를 비판했던 태영호 의원과 달리 일절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며 “망명이 좋은 소재는 아니지만 이번 건으로 교착 상태인 남북관계가 더 후퇴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6년 8월 망명한 태 의원은 국가정보원 조사가 끝난 같은 해 12월 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을 순한 양처럼 따르지 말고 다같이 들고 일어나자”며 두 손을 들어 “통일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조 전 대사대리의 귀순은 1년 3개월 전 이뤄진 ‘묵은 이슈’이기도 하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2년 전 잠적한 조 전 대사대리의 행적을 예의주시해왔을 북한이 귀순 사실을 모를 리 없다”며 “우리 정부가 의도적으로 귀순을 공개한 것도 아니어서 북한이 이를 문제 삼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말했다.
망명 빌미로 北 도발할 가능성도 낮아
북한은 2016년 12월 태 의원이 기자회견에서 북한 체제를 공개 비판한 지 사흘 만에 “국가 자금을 횡령하고 미성년자 강간범죄까지 감행한 후 처벌이 두려워 도주한 특정 범죄자”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시작했다. 북한은 그러나 조 전 대사대리를 향해 당시와 같은 수준의 비난을 이어가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송된 미성년 딸을 둔 조 전 대사대리가 앞으로도 공개 행보에 나설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아울러 11월 미 대선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이 그의 망명을 빌미로 고강도 무력시위에 나서기 힘들 것이라는 게 대북 외교가의 중론이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북한 입장에서 망명 충격파는 이미 2년 전 흡수했다”며 “업적을 내세울 게 없는 김 위원장이 창건일 행사에 열병식을 크게 할 수는 있어도, 코로나에 걸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위로 서신까지 보낸 마당에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김용현 교수도 “코로나와 수해 복구로 여력이 없는 김 위원장이 고강도 무력시위에 나서긴 힘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다만 우리 정부가 공무원 피격 사건의 책임을 물고 늘어질 경우 조 전 대사대리의 망명을 쟁점화할 가능성은 있다. 조한범 연구위원은 “북한이 공무원 피격 사건으로 코너에 몰리면,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 망명 건을 물고 늘어질 수는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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