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전북 정읍, 무성서원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아-어느 시대인들 난적의 변고가 없겠느냐만, 그 누가 오늘날의 역적과 같을 것인가? 또한 어느 나라엔들 오랑캐의 재앙이 없었겠느냐만, 그 어느 것이 오늘날의 왜놈과 같겠는가? 의병을 일으켜라.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어서 충의로운 넋이 낫지 않겠는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뛰는 이 격문은 110여 년 전인 1906년 면암 최익현이 무성사원에서 일본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키며 선포한 창의(倡義)격문이다. 그의 나이는 무려 74살이었다.
나는 최익현, 그의 제자로 함께 의병을 일으킨 임병찬을 만나러 정읍의 오지로 가고 있다. 칠보면과 산외면은 정읍에서도 동쪽 끝에 위치한 오지 중의 오지지만, 한국근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산외면 동곡리는 동학의 맹장인 김개남이 태어났고 이곳에 이사 온 전봉준과 함께 공부하고 자란 곳이다. 여기에서 10㎞ 떨어진 칠보면 무성리에 무성서원이 있고, 이 두 곳으로부터 20㎞ 떨어진 산외면 총성리는 임병찬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전국 47개 서원 중 전북에 위치한 유일한 서원인 무성서원은 1615년 세워져 도산서원, 소수서원 등 8개 서원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자랑스러운 곳이다. 서원에 들어가면 고풍스러운 서원 뒤쪽에 낡은 비석이 하나 눈에 뜨인다. 1905년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병오년인 1906년 6월 면암 최익현, 임병찬이 이곳에서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것(창의)을 기념해 세운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記蹟碑)’이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수제자로 ‘한국 성리학의 정통’으로 간주되었고 성리학의 ‘왕도정치’를 이상향으로 생각해, 서구의 제국주의가 밀려오자 목숨을 걸고 ‘위정척사’(衛正斥邪, 올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를 추구한 강직한 선비였다. 특히 그는 왕권을 강화하려고 경복궁을 중건하려는 대원군의 계획에 반대하다가 관직을 빼앗기는 등 바른 말을 아끼지 않았고, 민씨 정권이 1876년 나라의 문을 여는 강화도조약을 맺으려 하자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개항에 반대하는 항소를 올린 것은 전설적인 일화이다. 임병찬 역시 낙안군수로 민생을 노력하다가 탐관오리들의 횡포가 나아지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학문에 전념한 올곧은 선비이다.
최익현은 임병찬 등 제자 80여명과 무성서원에서 진군해 태인에 무혈 입성했다. 그곳의 무기로 무장한 의병들은 곡성, 남원, 순창을 점령하고 숫자도 1000명 가까이 늘어났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일본군이 아니라 관군이 정벌을 하러 오자 “동족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고 스스로 무장해제해 체포됐다. 그는 임병찬과 함께 일본 대마도로 압송됐다. 그는 “적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단식을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임병찬은 다음해 특별사면으로 귀국했고 스승의 유서를 고종에게 전달했다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이 선포되자 그는 다시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는 고종의 밀사를 통해 독립의군부라는 전국적인 의병조직을 조직해 사령총장으로 항일투쟁에 나서려 했지만 비밀이 누설되면서 다시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는 자결을 시도했지만 실패, 거문고로 유배를 갔고 스승처럼 단식 끝에 목숨을 잃었다.
나는 임병찬을 만나기 위해 산외면 총성리로 향했다. 물안개가 아름다운 옥정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가자 임병찬이 의병을 키우던 훈련장 등을 재현하기 위한 조감도와 함께 ‘대한독립의군부 사령총장 임병찬 묘’라는 비석이 자리 잡고 있다. 조국을 위해 단식으로 목숨을 바친 한 선비에게 나도 모르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나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그 때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최익현, 임병찬 등 선비들의 의병투쟁으로부터 시계바늘을 12년 전인 1894년으로 돌려보는 것이다. 12년 전 동학농민군은 척양척왜를 외치며 봉기,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상경했고 대원군이 유림도 같이 하기를 호소했을 때, 최익현과 임병찬 등 ‘애국적 유림’과 선비들이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논산의 유림들, 연산현감 이현세 등 일부 ‘계몽된’ 양반들은 동학군과 같이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를 외면했다. 아니 상당수는 ‘민보군’이라는 무장조직을 만들어 일본군, 관군과 합동으로 동학군을 타도하는 데 앞장섰다. 임병찬 의병 창의비로 올라오는 길에 걸려 있는 작은 팻말이 모든 것을 증언해주고 있다. 그것은 ‘김개남 피체지’라는 표식이었다. 그렇다. 임병찬의 고택은 김개남이 잡힌 곳이기도 하다. 김개남 이야기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그는 자신의 절친인 김개남이 동학의 지도자가 되자 자기 집으로 유인한 뒤 관군에게 밀고해 비참하게 죽게 만들었다.
많은 유림들에게는 일본군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격하고 자신들이 이상사회라고 생각하는 신분제의 봉건유교사회를 혁파하려는 동학이 더 큰 적이었고, 이들을 없애야 한다는 데에서 일본군, 관군과 이해를 같이 했다. 민족적 영웅인 안중근 의사조차도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김구가 이끌던 황해도 동학군의 토벌에 앞장섰고, 죽기 직전까지도 동학군을 “조선의 좀도둑”이라고 비판했다.
동학군은 단순히 일본군이 아니라 정부군+일본군+양반군(민보군)의 연합세력들에게 처절하게 학살당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이 자신들의 조선정벌의 가장 큰 장애인 민중세력을 초토화시키고 나라를 뺏으려 하자, 유림들은 그 때서야 나라를 지키겠다고 목숨을 걸고 나선 것이다. 한마디로 ‘때 늦은’ ‘때 놓친’ 애국, ‘병 주고 약 주는 애국’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선비들은 프랑스혁명과 함께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인권선언이 선포된 뒤 100년이 넘도록 신분제를 이상사회로 믿는 유교관을 고수하고 있었고, 이에 기초해 반봉건을 외친 동학농민들을 일본군, 관군과 손잡고 압살했다.
주목할 것은 동학의 주장이 그리 급진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왕정타파를 주장한 것도 아니고 노비제 폐지 등을 주장했지만 완전히 신분제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의 행실을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유림들은 그 정도조차도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위정척사는 자주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내용적으로는 ‘정체’되어 있었고 ‘퇴행적’이다. 다만 유림출신의 의병들이 다른 민보군들처럼 이후 친일파로 변신해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서지 않고 일본과 싸우다가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줄만 하다.
임병찬의 창의비를 보고 있자, 문득 '지리산' 등의 대하소설을 통해 선구적으로 한국근현대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온 이병주 작가가 한말을 배경으로 1978년 집필한 대하소설 '바람과 구름과 비(碑)'의 후기가 떠올랐다.
“한말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회환이다. 서울의 지식인들과 일부 지배층이 동학당과 합세하여 청국과 일본의 개입을 막고 혁명의 과정을 밟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 국왕과 동학도가 일치해 버렸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 임병찬 등 양반과 유림들이 절친을 동학이란 이유로 밀고하거나 민보군을 조직해 동학군을 괴멸시키려 하지 않고, 낡은 신분제의 타파 등 시대적 변화를 인정하고 동학군과 손을 잡고 밖으로는 제국주의와 싸우고, 안으로는 기득권을 버리고 낡은 봉건적 질서를 혁파해 나갔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찌 되었을까?
유림들의 목숨을 건 의병활동은 당연히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로 높이 평가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 숭고한 애국심과는 별개로 이들이 시대착오적인 봉건적인 유교관에 사로잡혀 일본에 대항해 함께 싸워야 할 동맹세력이었던 동학민중들을 척결한 뒤에야 뒤늦게 일본에 대해 목숨을 건 의병활동을 시작한 것은 너무도 비극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낡은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나름 ‘숭고한 애국심’으로,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애국’을 하고 있는 극우세력에서 나는 동학군을 때려잡던 민보군의 얼굴을 본다. 아니 각가지 위선이란 위선은 다 저지르면서도 자신들이 절대선이라고 착각하는 일부 ‘개혁세력’에서도 나는 민보군의 ‘잘못된 애국’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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