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9일 쿠웨이트의 사바흐 알 아흐마드 알 자비르 국왕이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자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오만,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 카타르 등 중동 많은 국가의 통치자들이 추모 행렬에 기꺼이 동참하였다. 인구 약 440만명의 작은 나라 쿠웨이트 국왕의 서거에 각국에서 애도가 이어진 것은 사바흐 국왕이 다져온 중재자이자 인도주의 지도자로서의 위상과 결부되어 있다.
1963년부터 2003년까지 40년 동안 외무장관으로 역임했던 사바흐 국왕은 2006년 국왕에 등극한 뒤 숱한 외교적 난제 속에서 균형적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러한 외교적 처세술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란 등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둘러싸여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쿠웨이트의 숙명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다. 1961년 쿠웨이트가 독립을 선포하자마자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역사적으로 이라크의 일부분이었다며 합병을 모색했다. 이렇게 건국 이후 주변 강대국들의 위협에 늘 노출되어 왔던 쿠웨이트 국왕은 갈등과 긴장 국면에서 어느 일방의 손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유야 어찌 됐든 사바흐 국왕은 얽혀 있는 중동 갈등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중재자임에 분명하다. 우선 카타르 단교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17년 6월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는 카타르와 국교 단교를 선언했다. 외교 관계 정상화 조건으로 카타르의 대 이란 정책 변화, 알자지라 방송국 폐쇄 등 카타르가 수용하기 어려운 카드를 내걸면서 현재까지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한때 카타르 단교 사태는 군사적 충돌이 우려되는 상황을 맞기도 했다. 사바흐 국왕은 도하, 리야드, 아부다비를 오가는 왕복 외교를 통해 긴장을 완화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한다. 2019년 5월 이슬람의 성지 메카에서 열린 걸프협력회의(GCC) 정상회담에 카타르의 압둘라 빈 나세르 총리가 참석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국왕과 만나 악수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 역시 사바흐 국왕의 물밑 작업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후문이다.
무엇보다 사바흐 국왕은 유엔으로부터 ‘세계 인도주의 지도자(Global Humanitarian Leader)’라고 명명되었을 만큼 인도주의 외교를 펼쳐 왔다. 1990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은 사막의 폭풍 작전을 통해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게 된다. 걸프 전쟁의 결과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바흐 국왕은 다시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양국 관계는 회복되었다. 2018년 2월 쿠웨이트에서는 이슬람국가(ISIS)와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라크 재건을 위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고, 약 300억달러에 달하는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쿠웨이트 국왕은 예멘 내전의 종식과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인도주의 위기 해결에도 발 벗고 나섰다.
이뿐만 아니다. 사바흐 국왕은 팔레스타인의 입장을 대변해 왔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남쪽의 난민 캠프 인근에는 칸 유니스(Khan Yunis)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에서 올해 2월 사바흐 국왕의 이름을 본떠 만든 도로가 생겨났다. 가자지구 재건을 위해 800만달러를 내놓은 뜻을 기리고자 도로에 쿠웨이트 국왕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바레인과 아랍에미리트가 아브라함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에 나서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사바흐 국왕은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라는 팔레스타인 측이 주장해 온 두 국가 해법의 원칙을 지키려 했다.
9월 30일 사바흐 국왕의 이복동생인 나와프 알 아흐마드 알 자비르 왕세제가 쿠웨이트 국회에서 선서 절차를 거쳐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다. 나와프 신임 국왕은 이복형제인 미샬 알 아흐마드를 왕세제로 지목하면서 새로운 권력 체제를 빠르게 정비해 나가고 있다. 새로운 국왕의 지도력하에서 쿠웨이트가 사바흐 국왕이 걸어왔던 외교적 전통을 어떻게 이어 나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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