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수사의 첨병, 프로파일러의 세계]?
<5> 울산 자살방조? 강간 추행 사건
편집자주
범죄 드라마나 영화에서 '초능력자'처럼 등장해 범죄자의 감정선을 무너뜨리는 프로파일러. 그러나 실제 프로파일러는 끊임없이 범죄자 심리나 행동패턴을 분석해 범행의 이유를 찾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월요일마다 범죄 현장 뒤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프로파일러의 세계를 조명합니다.
"한 경장, 사람이 자기 목숨을 끊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
연일 푹푹 찌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18년 8월 22일 저녁. 울산 남부경찰서 형사과의 강모 경위는 울산경찰청 과학수사계 소속 프로파일러 한수영(41) 경사(당시 경장)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걸더니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6일 전 들어온 '남녀 동반자살' 사건을 두고 한 얘기였다. 자살을 시도한 직후 병원으로 옮겨져 곧바로 의식을 회복한 남자 정모(44)씨는 홍모(29)씨와 동반자살을 한 거라며 담당 경찰관에게 자살 경위까지 술술 풀어냈지만, 정작 정씨의 말을 믿기엔 의심쩍은 구석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여러 정황상 애초부터 정씨는 자살할 의지가 없었고 오히려 범죄를 위해 동반자살로 위장한 건 아닌지 의심이 갔다. 하지만 막연한 심증일 뿐 물증이 전혀 없다는 게 수사팀의 고민이었다. 수사팀으로선 정씨가 정말 동반자살을 할 의지가 있었는지를 밝히는 게 가장 다급한 숙제였다.
“죽고 싶었습니다”, 동반자살 주장을 의심한 수사팀
2018년 8월 17일 오전 6시 20분쯤 경찰에 울산 남구의 한 오피스텔에 불이 났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경찰과 119 구급대원은 오전 6시 30분쯤 현장에 도착했다. 연기가 새어나오는 집의 문을 부수고 들어간 구급대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부엌에 쓰러져 있던 정씨였다. 정씨를 구출하는 동안 다른 구급대원들은 굳게 닫힌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을 연 순간 검은 연기들이 구급대원들의 눈을 덮쳤고, 연기 사이로 갈탄에 불을 피운 화로 2개와 간이 쇼파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홍씨가 보였다. 두 사람은 즉각 병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금방 의식을 되찾은 정씨와 달리 홍씨는 바로 눈을 뜨지 못했다.
언뜻 두 남녀의 동반자살 시도로 여겨지는 듯했던 사건은 3시간 만에 반전을 맞았다. 두 사람의 신원을 조회하던 경찰은 정씨가 2009년 동반자살을 가장해 성범죄를 저질러 징역 6년을 선고 받은 전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게 이상했다. 동반자살이라고 했지만 정작 연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틈이 청테이프로 둘러진 안방엔 홍씨만 있고 정씨는 부엌에 누워있었던 점, 이로 인해 정씨만 병원후송 직후 의식을 회복한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수사팀은 정씨가 동반자살을 위장한 범죄를 저지른 것일 수도 있다고 봤다. 경찰은 곧바로 정씨를 긴급체포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초기 수사는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정씨가 경찰 조사에서 "지난 5개월간 5번이나 동반자살을 시도했다" "일용직 노동으로 번 5,000만원과 대출받은 5,000만원을 주식과 도박으로 탕진해 빚만 남아 삶의 의지가 없다"고 한 진술도 나름 일리가 있었다. 그는 동반자살 경위에 대해서도 막힘 없이 풀어냈다. 동반자살 전날 홍씨로부터 자살시도를 제안 받고 자신의 차를 이용해 경기 동두천에 사는 홍씨를 만난 뒤 그녀가 준비한 자살도구를 싣고 함께 울산 자기 집으로 왔다고 했다. 정씨와 함께 있었던 유일한 당사자인 홍씨가 의식이 없던 터라 경찰로선 정씨 주장이 거짓인지 여부를 정확히 입증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살심리부검,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직접 증거 확보가 여의치 않았던 수사팀은 한 경사에게 정씨에 대한 자살심리 부검을 의뢰했다. 수사가 탄력을 받으려면 무엇보다 정씨에게 동반자살 의사가 있었는지를 입증하는 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살심리 부검은 당사자의 대인관계, 사회생활 등 생애 전반의 정보를 토대로 이 사람이 정말로 자살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링 기법이다. 특히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직접적 증거 확보에 한계가 있거나, 여러 증거에도 피의자가 자백하지 않는 경우 이를 보완해 줄 수 있는 돌파구 역할을 한다.
정씨에 대한 자살심리 부검을 위해 한 경사 등 5명의 프로파일러로 구성된 분석팀이 꾸려졌다. 분석팀은 우선 정씨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심층면담을 진행해 정씨의 진술 신빙성과 범행의도를 살펴보기로 했다. 성향분석은 성격검사, 심리분석, 자살위험성 평가 등 총 3가지로 이뤄져 있다. 촘촘하고 세밀한 그물망에 물고기가 빠져나갈 수 없듯 교차검증을 통해 피의자의 심리상태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목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성향분석 결과에서 정씨는 자살위험성이 매우 낮은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정씨는 채무관계로 자신의 현재 처지를 비관하고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있긴 하지만, 자살을 실행할 행동력은 상당히 낮게 나왔다. 오히려 그는 만성화된 무력감을 겪고 있을 뿐 자살의 결정적 요인인 충동성과 분노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씨의 성향이 분석되면서 답보 상태에 있던 수사에도 속도가 붙었다. 수사팀은 자살의지가 낮다는 성향 분석 결과를 토대로 그동안 정씨가 진술했던 내용에 모순은 없는지, 나아가 자살의지가 없는 사람이 동반자살을 꾀하면서까지 이루고 싶었던 범행동기가 무엇인지를 찾는데 주력했다.
그러던 중 병원에 입원해 있던 홍씨도 의식을 되찾았다.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수사팀과 프로파일러팀은 완벽한 공조로 정씨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수사팀은 홍씨의 관점에서 사건의 정황을 다시 재구성했고, 프로파일러팀은 정씨에 대한 심층면접을 진행해 홍씨의 진술과 어긋나는 점이 없는지를 분석했다.
동반자살을 가장한 추악한 성범죄
범인이 자신 있어 하던 알리바이가 되레 범행동기의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정씨에 대한 자살심리 부검이 그랬다. 앞서 정씨는 수사팀에 동반자살에 대한 알리바이로 5개월 동안 다섯 차례 동반자살을 시도했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동반자살을 함께 시도했던 대상이 모두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홍씨의 진술이 사건 해결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연기까지 흡입해 홍씨가 깨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 정씨는 홍씨가 진술하기 전까지 진짜 범행 동기를 밝히지 않았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와 홍씨는 SNS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홍씨가 처음 '함께 죽자'고 제안할 당시 정씨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홍씨와 얼굴 사진을 주고받은 뒤 정씨는 갑자기 홍씨의 동반자살 제안에 적극 동조하기 시작한다. 정씨는 그렇게 홍씨를 만나 울산 자기 집으로 데려온 뒤 갈탄을 피우기 앞서 홍씨를 끌어안았다가 그녀가 "소리지르겠다"며 뿌리치자 추행을 그만뒀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홍씨의 동반자살 제안에 보조를 맞춘 것이었다.
수사팀은 정씨가 홍씨를 추행하다 멈춰선 행동 역시 배경이 있을 거라고 봤다. 지난 2009년 정씨는 미성년 여성 2명을 온라인에서 만나 동반자살을 권유하는 방식으로 접근해 "죽기 전 한번 성관계를 하자"라며 강간을 시도한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당시의 기억이 학습효과로 작용해 홍씨에 대한 성추행을 멈췄다는 게 수사팀의 분석이다. 혹시라도 홍씨가 죽지 않고 성추행으로 고소하면 또다시 감옥살이를 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한 경사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정씨는 결코 자살을 실행할 사람이 아니었다"고 했다.
법원 판결문에 증거로 인용된 프로파일링 보고서
정씨에게 있어 동반자살은 자신의 그릇된 성욕구를 충족시키고, 증거를 인멸해주는 수단이었다. 정씨의 자살 의사를 입증하지 못했다면, 정씨는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여성을 먹잇감으로 여기며 동반자살의 손을 내밀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수사팀은 프로파일러 분석을 토대로 정씨에게 자살방조미수 뿐만 아니라 강제추행 혐의까지 적용했다. 2019년 1월 24일 울산지법은 자살방조미수ㆍ강제추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특히 담당형사팀과 프로파일러가 공조해 작성한 프로파일링 보고서는 검찰에서는 피의자의 자살방조를 입증하는 증거로, 나아가 법원 판결문에서는 증거로 인용되는 쾌거를 이뤄냈다. 한때 간접증거로만 여겨지던 프로파일링 보고서가 과학적 수사증거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 상고를 기각하고 1심 판결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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