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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경우에도 낙태는 죄일 수 없다

입력
2020.10.23 14:30
수정
2020.10.23 18:0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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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청년 페미니스트 100인의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 선언 . 뉴스1

청소년·청년 페미니스트 100인의 '낙태죄' 전면 폐지 촉구 선언 . 뉴스1


어떤 말로 글을 시작해야 하는지 계속 고민했다. 출판사 봄알람이 유럽 5개국의 여성 활동가들을 만나 낙태죄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한 책 ‘유럽 낙태 여행’으로 이야기를 꺼내 볼까, 아니면 레즈비언 할머니가 낙태에 필요한 돈을 구해야 하는 손녀와 보낸 하루 동안의 일을 그린 영화 ‘그랜마’로 시작할까? 산아 제한 정책이 펼쳐질 무렵인 1960년대 등장한 한국의 ‘낙태 버스(전국을 돌아다니며 영구피임시술과 낙태 시술을 진행했던 버스)’에 관해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 혹은, 고강도의 노동을 하면서도 아이를 원하는지 아닌지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일곱 자식을 낳고 길러야 했던 나의 할머니에 대해 말해야 할까?

어떤 말로 시작해도 새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태죄에 대해서라면 여성들은 이미 같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은 자신의 것이며,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그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성을 자궁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이번에도 똑같이 해야만 하는 것이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는 임신 14주까지는 여성의 임의대로, 24주 이내에는 유전적 질환, 성범죄로 인한 임신, 근친 간 임신의 경우에 낙태가 가능하도록 하는 형법과 모자 보건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음에도 낙태죄를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임신 14주까지 여성이 자신의 의지대로 낙태를 할 수 있다면 뭐가 더 필요하냐고 누군가는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다. 낙태를 할 수 있는 조건을 국가가 정하는 순간, 여성의 몸은 또다시 통제받는 대상이 된다. 게다가 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은 변함없이 위험을 감수하고 낙태를 해야 한다. 프랑스는 임신 12주까지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나 많은 여성이 12주 이후에도 낙태가 가능한 네덜란드로 이동해 낙태를 하고, 24주까지 허용하고 있는 네덜란드 역시 낙태 지정 병원을 두고 있어 사실상 여성들이 완전히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낙태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빈곤층이나 외국인 여성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낙태죄가 전면 폐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즉, 모든 여성이 존엄하고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낙태죄는 낙태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여성이 스스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느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낙태죄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언급하며 종종 이렇게 말한다. 자유로운 낙태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당신 역시 낙태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이래도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말할 수 있냐고 말이다.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건가? 나는 이미 태어났고, 여성을 자궁으로 인식하는 나라, 여성이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어려운 나라, 아이를 존엄한 한 인간이 아니라 인구수라는 숫자로만 보는 나라에서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심한 여성으로 살아가는 중이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9를 기록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어떤 여성이든 원치 않은 임신은 중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겹더라도, 또 한 번 힘주어 말한다. 낙태는 어떤 경우에도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황효진 콘텐츠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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