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별세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한국경제의 고속성장과 궤를 같이 한 인물이다. 특히 '세계 초일류'로 요약된 그의 승부사 기질은 현재 삼성전자를 글로벌 기업 반열에 올려놨다는 평가까지 낳고 있다. 국내 대표적인 수출 효자로 자리매김한 반도체를 포함해 휴대폰과 TV 등이 그에게서 잉태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과오도 남아 있다. 정경유착을 포함해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파열음과 비자금 조성 의혹 등은 여전히 오점으로 지적된다.
출생과 결혼, 고속승진
1942년 1월9일 대구 인교동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47년 서울에서 혜화초등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 1학년까지 소년기부터 유학 생활을 했다. 서울사대부중ㆍ부고를 졸업한 뒤 연세대에 입학했지만 자퇴하고 1961년 아버지의 모교인 일본 와세다대로 옮겼다. 1966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MBA) 석사과정을 마쳤다.
유학생활은 그를 영화와 자동차에 빠지게 만들었다. 부모와 떨어져 지냈던 일본 초등학생 시절 민족차별과 문화차이 등으로 겪은 외로움을 달래려 영화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1년 반 동안 차를 여섯 번이나 바꾸고 자동차를 직접 분해ㆍ조립하는 등의 관심을 쏟아 이후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1967년 맞선으로 만난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장녀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리움 관장과 결혼, 재용(삼성전자 부회장), 부진(호텔신라 대표), 서현(삼성물산 사장) 등을 슬하에 뒀다.
1966년 중앙일보 산하 동양방송 이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그는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을 맡았다가 1979년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이동했고, 1987년 이병철 창업주 사망 이후 삼성그룹 회장에 올랐다. 1998년에는 그룹 차원 임원직을 폐지하며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다.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경영일선에서 잠시 물러났지만 201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 그간 직함을 유지해 왔다.
글로벌 삼성 일군 승부사
그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오늘의 글로벌 삼성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의 세계적 경쟁력이 된 반도체와 휴대폰은 그의 과감한 선제적 투자 결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전기차 배터리와 바이오의약품 등 비교적 최근 삼성 계열사가 뛰어든 신사업도 그가 진출 초기부터 대규모 적자를 감수하면서 공격적 투자를 독려한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항상 일등이 되어야 한다”는 ‘제일주의’를 강조한 그의 집념과 승부욕은 삼성의 기업문화로 자리잡았다. 그는 이병철 창업주의 3대 경영이념(자율경영, 기술중시, 인간존중)에 서구 합리주의와 경쟁주의를 접목한 ‘삼성경영학’을 정립했다. 또 기업은 언제나 위기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위기경영’을 앞세워 늘 시장변화에 적응할 체질을 갖추는 데 주력했다. 삼성이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오히려 도약의 발판으로 만든 것도 그의 이런 경영철학이 주효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는 셋째였지만 두 형(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을 제치고 후계자에 올랐다. 이는 이병철 창업주의 선택이었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이맹희ㆍ창희 형제가 아버지에게 밉보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1966년 삼성이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 등을 밀수하다 적발되면서 이병철 창업주는 사임과 함께 비료공장을 국가에 헌납했고 이창희 전 회장이 법적 책임을 지며 구속됐다. 1969년 이병철 창업주와 삼성그룹의 비리를 고발하며 처벌을 요청하는 탄원서가 청와대에 제출됐다. 이병철 창업주는 당시 그룹총수 대행이던 이맹희 전 명예회장을 의심했고 이창희 전 회장도 용의선상에 올랐다. 이병철 창업주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맹희 전 명예회장이 삼성그룹 직책을 대부분 포기하도록 하며 이창희 전 회장은 미국으로 떠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장남과 차남이 후계구도에서 멀어지며 이건희가 자연스럽게 경영권 승계자로 자리잡게 됐다는 관측이 가장 유력하다.
비밀경영과 정경유착
눈부신 성취와 함께 동시에 그는 불투명 경영과 정경유착 같은 한국 재벌의 부정적 이미지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삼성그룹이 지주사 체제를 갖추지 않으면서도 비서실,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 등으로 계속 이름을 바꿔온 비공식 조직을 통해 소수의 오너일가 지분으로 전 계열사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부작용도 낳았다. 무엇보다 글로벌 대표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마저도 그의 일가 지분율이 높지 않은데도 미래전략실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투자와 사업계획, 인사 등이 좌우됐다. 4년전 당시 '최순실 게이트'에 휘말려 미래전략실이 해체될 때까지 이런 경영 행태는 지속됐다.
이 회장은 또 삼성그룹 총수로서 숱한 의혹과 사법처리 선상에 오르내렸다.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사건에 연루돼 첫 검찰 소환조사를 받은 그는 250억원 비자금 제공 혐의에도 불구, 불구속기소 처분을 받았다. “국내외 경제에 미치는 파장 등을 폭넓게 검토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1996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항소를 포기했고 1997년 개천절에 사면 복권돼 1998년 4월 경영에 복귀했다.
2000년에 들어선 법학 교수 43명이 이 회장의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를 고발했다.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CB)를 헐값에 발행해 이재용 부회장에게 몰아줬다는 의혹이 불거진 게 이때였다. 이 부회장은 이 과정을 통해 에버랜드 최대주주에 올랐다. 대법원은 2009년 배임죄를 적용한 원심을 깨고 에버랜드 CB 저가 매각과 관련해 이 회장에게 무죄를 선언했다.
2005년엔 이른바 ‘삼성X파일’ 사건이 터졌다. 삼성 임원진이 정치권과 검찰에 금품제공을 논의한 것이 녹음파일 형태로 폭로된 것이다. 그의 지시로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이 대선자금을 나눠주는 심부름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지만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그는 서면조사만 받고 무혐의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7년 삼성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 차명계좌에 들어있던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삼성 오너 일가의 경영권 불법승계와 비자금 조성, 정관계 로비 의혹 등을 줄줄이 폭로했다. 이는 조준웅 특검의 ‘삼성특검’으로 이어졌고 삼성그룹과 오너일가는 강도 높은 검찰수사를 받았다.
2008년엔 차명계좌가 적발되고 1,000억원대 세금포탈 혐의가 드러나면서 그는 삼성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삼성과 관련된 모든 직책을 내놓고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에게 경영권을 맡기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증여세를 피하면서 삼성 그룹의 지분을 물려받으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그의 외아들인 이재용 부회장도 최고고객책임자(CCO)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배임과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불구속기소돼 2009년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 집유 4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2009년 12월 대통령 특별 단독사면을 받아 201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다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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