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여년 전 이웃나라로 시집온 귀족 여인이었을까. 경남 창녕 고대 가야 고분에서 나뭇가지 모양의 신라 금동관이 나왔다. 대량 출토된 장신구도 신라 양식이었다. 가야 고분에서 신라 유물이라니,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8일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 교동 Ⅱ군 63호분 발굴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연구소 측은 “비화가야 최고 지배층 묘역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내 63호분은 39호분의 봉토에 가려져 드물게 도굴되지 않은 고분”이라며 “지난해 11월 63호분의 시신을 안치하는 곳을 연 뒤 본격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고대 여섯 가야 중 하나인 비화가야는 창녕이 거점이었다.
성과는 예상대로다. 도굴을 피한 덕에 비화가야 최고 지배층 고분 가운데 처음으로 온전한 상태의 꾸밈유물(착장품) 일체가 확인됐다. 머리 부분에 쓴 금동관, 양쪽 귀에 걸었을 금귀걸이, 목에 둘렀을 남색 구슬 목걸이, 허리에 맨 은허리띠, 손에 낀 은반지가 고스란히 발굴됐다.
흥미로운 건 이 장신구들이 신라 고분 부장품들과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금동 신발만 없을 뿐 지난달 경주 황남동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장신구들과 구성과 형태가 거의 같다. 특히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을 관테(너비 3㎝) 위에 출(出)자처럼 3단으로 세워 높이가 21.5㎝에 이르는 금동관은 전형적인 신라 양식을 선보였다.
전문가들은 이를 신라ㆍ가야 최상층 지배자 간 교류 가능성을 시사하는 특징으로 본다. 소국인 비화가야가 인접 대국 신라와 형제 관계를 유지하며 지위를 과시하는 위세품들을 하사 받은 것 아니냐는 얘기다. 이렇게 보는 건 무덤 자체가 가야 특유의 무덤 구조인 구덩식 덧널무덤인 데다 토기 형태 역시 가야 형식을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 5세기 중ㆍ후반으로 추정되는 무덤 조성 시기를 감안하면, 그 때 비화가야가 이미 신라에 흡수된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무덤 주인은 고위층 여성일 공산이 크다. 남성 무덤에서 주로 보이는 대도(大刀) 없이 귀걸이와 은장도가 출토됐고, 장신구가 놓여진 상태로 가늠해 봤을 때 묻힌 이는 키 155㎝가량의 아담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게다가 묻힌 이의 발치 아래에는 별도의 순장 공간도 발견됐다. 순장 공간은 바닥을 40㎝ 정도 낮춘 길이 220㎝, 너비 130㎝ 규모로, 여기에서는 치아와 다리뼈 등 순장자 2명의 흔적이 순장자를 안치한 목관의 흔적과 함께 나왔다.
양숙자 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순장자를 목관에 안치한 걸로 봐서는 순장자의 신분도 결코 낮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무덤의 주인은 고위층 중의 고위층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박광춘 동아대 교수는 “양산 금조총처럼 가야로 시집온 신라 최고 신분 여성의 무덤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발굴 장면 동영상을 내달 5일 유튜브로 공개하고 조사단원들이 질문에 실시간 댓글로 답변하는 형식의 온라인 설명회 자리도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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