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베를린시 심사위원회 설치 추천서 입수
설치 검토 때부터 "일본 반발 이해 못 해" 명시
일본 정부 압박에 결정 바꾸며 핑계 댄 정황
독일 수도 베를린 당국이 지난해 7월 '평화의 소녀상' 설치를 허가할 당시, 이미 일본 정부가 소녀상 설치에 반발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했던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일본의 반발을 감수하며 소녀상 설치를 허가했던 베를린 당국이 최근 소녀상을 철거하는 것으로 결정을 번복하며 '핑계'나 '거짓 해명'을 들었을 수 있다는 의심이 짙어지고 있다.
2일 한국일보가 입수한 베를린 도시공간 및 건축예술 심사위원회(KIST)의 '베를린 소녀상 설치 추천서’를 살펴보면, 심사위원회는 추천서에 당시 소녀상 설치에 깊이 공감한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현지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협의회)가 지난해 2월 "미테구(區) 거리에 소녀상을 세우겠다"며 미테구청에 13쪽 분량의 신청서를 제출하자, 심사위원회가 소녀상 설치의 타당성을 따져 본 것이다.
공공장소에 소녀상과 같은 조형물을 설치하려면 행정당국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당국은 심사위원회 추천서를 근거로 허가 여부를 결정한다. 심사위원회는 베를린시 소속 공공기관과 도시예술 단체 등 총 9개 기관으로 구성되고, 이 중 5곳 이상이 찬성표를 던져야 심사위원회 명의의 추천서를 내줄 수 있다. 당시 소녀상 설치 신청안은 총 6곳의 동의를 얻어 심의를 통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테구청은 이를 근거로 올해 7월 최종 허가를 내줬고, 소녀상은 9월말 미테구 유니온광장에 세워졌다.
하지만 미테구청은 소녀상이 세워진 지 불과 10여일 만인 지난달 7일 돌연 코리아협의회에 소녀상 철거를 명령했다. 이후 협의회가 소녀상 철거 명령에 대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면서 현재 소녀상 철거는 잠시 중단된 상태다.
미테구청은 소녀상 철거 명령을 내리면서 사전에 알리지 않은 '비문'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웠다. 비문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태평양 전역에서 여성들을 성노예로 강제로 데려갔고, 이런 전쟁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 캠페인을 벌이는 생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는 짧은 설명이 담겨있다. 미테구청은 소녀상에 실린 비문이 일본을 겨냥한 내용인 만큼 양국이 외교적 긴장 관계에 놓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소녀상 철거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미테구청이 소녀상 설치를 허가하면서 근거로 삼은 추천서에 이미 이런 내용이 적시된 것으로 확인됐다, 추천서에는 "과거 독일군의 위안소 제도, 나치 강제 노동 수용소의 강제 매춘 제도가 있었지만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낀다" "소녀상을 통해 일본의 성폭력범죄와 함께 전시 성폭력 범죄에 대한 논의도 촉발되면 바람직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미테구청 역시 소녀상의 의미와 그 파급 효과를 미리 알고 있었던 셈이다.
현지 시민단체들은 독일 당국이 심사 단계에선 일본군 위안부를 상징하는 소녀상 설치에 공감을 했다가 이제 와서 일본과의 관계를 문제 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독일이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일본 정부의 압박에 못 이겨 입장을 바꿨으면서, 다른 핑계를 대고 있다는 것이다. 한정화 코리아협의회 대표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당초 심사위원회는 소녀상 설치를 왜 일본이 반발하는지 납득하지 못했는데, 이것을 보면 비문을 이유로 철거를 명령한 당국의 설명은 거짓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협의회는 미테구의회에서 소녀상 철거 명령이 철회될 수 있도록 이 문제를 알리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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