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토요일 격주로 식재료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은 아무도 몰랐던, 식재료를 제대로 대하는 법을 통해 음식의 기본을 이야기합니다.
얼마 전 한 남자의 틱톡 비디오가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소위 말하는 ‘바이럴’이 된 것이다. 올해 서른여덟살인 네이선 아포다카(Nathan Apodaca)가 롱보드를 타고 고속도로를 미끄러져 내려간다. 큰 병의 크랜베리 주스를 마시며 입으로는 클래식 록 밴드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의 1977년 히트곡 ‘드림스(Dreams)’를 립싱크로 따라 부른다.
순수하게 즐기는 듯한 분위기를 물씬 풍겨 비디오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사실 그는 어려운 형편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이다호주의 감자 창고에서 포장 및 운반 노동자로 일하는 가운데 집이 없어 캠핑카(RV)에서 두 딸과 떨어져 혼자 산다. 요즘 미국에서 문제인 ‘직업 있는 홈리스’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차가 아침 출근길에, 그것도 일터 코앞에서 퍼지자 롱보드를 탄 상황이었다.
마음을 읽을 수는 없지만 비디오를 보면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쩔 수 없는 판국이니 스스로 기분을 더 망치지 말자’랄까. 그래서였을까, 25초짜리 짧은 비디오가 대박을 치면서 좋은 일들이 벌어졌다. 비디오를 즐긴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응원 메시지를 보내는 한편, 그를 패러디해 롱보드를 타고 주스를 병째 마시며 ‘드림스’를 따라 부르는 영상을 올렸다. 심지어 플리트우드 맥의 드러머인 믹 플리트우드마저 패러디 영상으로 화답했으니, 2,500만에 이르는 조회수와 더불어 바이럴 비디오의 주인공으로서 이룰 건 다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좋은 일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병째 마신 크랜베리 주스의 제조업체인 ‘오션 스프레이(Ocean Spray)’가 다시는 출근길에 고생하지 말라며 5년치의 주스와 더불어 새 차를 보내주었다. 앤디 워홀이 말한 ‘15분간의 명성’일 수도 있고, 운이 좋아서 공짜로 새 차를 얻었노라고 여길 수도 있다. 어쨌거나 바이럴 비디오로 덕분에 그가 어려운 형편을 헤쳐나갈 에너지를 잔뜩 얻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이후 그는 1만 달러를 모금해 절반은 어머니에게 주고, 나머지로는 딸들과 함께 살 집을 찾는데 쓴다고 한다.
뻣뻣하고 신맛 강한 생크랜베리
크랜베리(정확하게는 크랜-라즈베리) 주스가 아니었다면, 만약 그가 마신 음료가 콜라나 다른 과일 주스였다면 과연 이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을까? 크랜베리와 오션 스프레이 양쪽의 역사를 다 아는 나로서는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크랜베리는 오션 스프레이가 아니었다면 주스 같은 음료로 존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랬다면 비디오의 분위기도 사뭇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간접 광고를 하려는 건 아니냐고? 전혀 아니다. 어차피 크랜베리만 살펴본다면 이야기는 절반 혹은 그 이하의 재미밖에 주지 못한다. 무엇보다 크랜베리라는 과일이 맛과 아주 친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2005년,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추수감사절 저녁식사에 초대 받았다. 대학원 원우가 혼자 식사하지 말라며 부른 자리라 감사하는 마음 절반, 칠면조를 포함한 미국인의 진짜 추수감사절 식사를 맛볼 수 있겠다는 기대 절반으로 와인 한 병을 사서 찾아갔다.
칠면조 통구이나 흔히 ‘스터핑(stuffing)’이라 불리는 각종 곁들이 음식, 단호박 파이 등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단역 조연에 가까운 크랜베리 젤리가 나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 통조림에 담겨 있어 따면 정말 크랜베리로 만든 젤리가 가득 차 있다. 접시를 대고 따지 않은 캔의 밑을 툭툭 치면 깡통에 새겨진 골까지 그대로 찍힌 거대한 젤리 한 덩어리가 꿀럭, 하고 빠져 나온다. 우리로 치자면 묵에 플라스틱 포장재의 바닥 문양까지 찍혀 나오는 형국과 흡사하다. 음, 크랜베리는 칠면조에 꼭 곁들여 먹어야 하는 걸까? 그래야만 한다면 굳이 이 못생기고 조금은 괴기스럽기까지 한 깡통 젤리를 사서 써야만 하는 걸까?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나는 궁금함에 푹 젖어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추수감사절, 나는 간소하게 혼자만의 식탁을 차렸다. 칠면조 대신 뼈 붙은 닭가슴살을 구웠지만 핵심은 크랜베리였다. 그 철에만 나오는 생크랜베리를 사서 소스를 직접 만들어 볼 심산이었다. 콩알만한 체리라고 하면 될까? 크기는 작지만 껍질 색깔이며 반지르르 흐르는 윤기가 체리를 똑닮았건만, 한 알 맛을 보니 기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일단 껍질이 제법 뻣뻣하고 두꺼운 가운데, 내부가 비어 있어 속살이랄 게 거의 없었다. 껍질을 씹자 바람이 빠지는 형국이 마치 공갈빵 같았으며, 잘 씹히지도 않아 사레 들리기 딱 좋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맛은 한결 더 안 좋았다. 일단 얼굴을 반사적으로 찌푸릴 정도로 신맛이 엄청나게 강한 가운데 씁쓸함 또한 꽤 두드러졌다. 그 신맛과 균형을 맞추려다 보니 얼마일지도 모를 만큼 엄청난 양의 설탕을 쏟아 부었다. 두꺼운 껍질 탓에 한참을 끓이고 나서야 소스 비슷한 걸 얻을 수 있었다. 아,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렇게 생크랜베리와 한참 씨름을 하고 난 뒤에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미국인들의 깡통 젤리 선택은 나름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을.
크랜베리 잘 먹는 단 한 가지 요령
크랜베리는 그런 과일이다. 생으로 먹을 수는 있지만 즐겁지는 않고, 잼을 만들자니 신맛 및 씁쓸한 맛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설탕을 아낌없이 들이부어야 한다. 그래서 대체로 솔로보다 사과나 서양배, 블루베리 등의 다른 과일과 최소한 듀오는 이루어야 되려 개성을 더 잘 맛볼 수 있다. 이래저래 쓰임새도 미국이나 영국의 추수감사절, 혹은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에 전통을 따르는 차원으로 먹는 경우가 주를 이룬다. 크랜베리는 늪지에서 자라는 다년생 덩굴에 맺히는 열매로, 내부의 공기방울 덕분에 물에 떠오르는 특성을 활용한 추수 방식이 나름 유명하다. 9월부터 11월 전반부까지 크랜베리의 수확철이 되면 밭에 물을 무릎 높이까지 채운다. 그리고 벼를 수확하는 콤바인을 똑 닮은 기계로 따낸 열매가 물에 뜨면 조금씩 퍼 올려 수확을 마무리한다.
크랜베리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항생 효능을 위해 진작부터 써왔던 약재이지만, 식재료로서의 틈새는 좁디 좁았다. 그 틈새를 넓힌 장본인이 바로 미국의 오션 스프레이이다. 오션 스프레이는 근 100년 전인 1930년, 메사추세츠주의 크랜베리 농부 세 사람 (마커스 L. 유란, 엘리자베스 F. 리, 존 C. 메이크피스)에 의해 협동조합으로 출범했다.
지금껏 살펴 보았듯 추수감사절에 잠깐 곁들이로나 소비되는 크랜베리의 인지도 및 수요를 늘리기 위해 세 사람은 일상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제품 개발을 시도했다. 그 결과물 가운데 대표적인 게 바로 네이선 아포다카가 병째 들이킨 크랜베리 주스이다. 아이폰이나 아이패드처럼 필요한지도 모르고 있던 신상품을 개발해 수요를 만들어 내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주스 덕분에 크랜베리는 미국에서 일정수준 일상의 식재료로 자리를 잡았다. 세 사람이 설립했던 오션 스프레이는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는 위스콘신, 뉴저지, 오레곤 등 미국 내는 물론 브리티시 콜럼비아 등의 캐나다, 칠레까지 700여 농가를 아우르며 여전히 협동조합으로 운영되고 있다.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오션 스프레이는 크랜베리 젤리와 주스를 비롯해 말린 크랜베리 등의 간식류까지 제품군을 꽤 넓혔다. 심지어 크랜베리 일색의 제품군을 자몽 주스 등으로 넓히기도 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내가 호기심에 만들어 보았던 크랜베리 소스의 공식에 일관되게 충실하다. 설탕을 넉넉하게 써 단맛과 씁쓸한 맛의 균형을 맞추는 공식 말이다. 예를 들어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크랜베리 주스의 경우 100㎖당 당류가 11.5g 함유되어 있다. 단맛 음료의 대명사인 코카콜라를 살펴보면 같은 양에 당류가 10.7g으로 되려 적으니 감이 잡힐 것이다. 따라서 생재료보다 이미 완성된 가공품을 먹을 가능성이 100%일 크랜베리를 잘 먹는 요령으로는 ‘설탕에 유의하자’ 하나면 충분하겠다.
크랜베리 칵테일
잘 먹는 법을 살펴보는 연재인데 완제품 이야기만 하자니 뭔가 아쉬워, 간단한 칵테일 레시피를 소개하며 마무리하자. 바 등에서 흔히 마실 수 있을 정도로 크랜베리와 보드카는 끼리끼리 잘 붙어 다닌다. 이 둘의 기본 조합에 오렌지주스를 더하면 마드라스(Madras), 파인애플주스를 더하면 베이 브리즈(Bay Breeze), 자몽주스를 더하면 시 브리즈(Sea Breeze)가 된다.
일단 보드카와 크랜베리주스를 1.5 대 3으로 섞은 뒤 마시고 싶은 칵테일에 맞춰 오렌지, 파인애플, 자몽주스를 1의 비율로 더하면 된다. 원한다면 대야 단위로 비율을 맞춰 만들어도 상관 없지만 모두가 주당은 아니므로 액체 온스를 기준으로 칵테일을 만들자. 29.57㎖이니 반올림해 30㎖라고 치고 보드카 45㎖에 크랜베리주스 90㎖, 나머지 주스 30㎖의 비율로 섞으면 적당히 즐길 수 있는 한 잔 분량이 나온다. 바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셰이킹’을 통해 온도를 낮추고 싶다면 커피를 담아 마시는 텀블러에 얼음과 함께 담아 뚜껑을 덮고 잘 흔들어 준 뒤 주둥이로 칵테일만 따라 잔에 담으면 된다.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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