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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에 가려진 재능, 페리앙의 의자에 누우면 삶의 기쁨이...

입력
2020.11.0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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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샬로트 페리앙
70년간 가구와 건축, 사진 등 작품 남겨
'삶과 디자인이 행복을 만든다' 신념 반영

샬롯 페리앙(왼쪽)과 그가 디자인한 가구. 까시나 홈페이지 캡처, 삼성물산 제공

샬롯 페리앙(왼쪽)과 그가 디자인한 가구. 까시나 홈페이지 캡처, 삼성물산 제공


르 코르뷔지에, 피에르 잔느레…

건축과 가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한번 쯤은 들어봤을 이름들인데요. 이들과 오랜 협업을 할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졌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려진 인물이 있습니다.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 프랑스 파리 출신 여성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샬로트 페리앙(1903~1999)입니다.

페리앙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는데요. 프랑스 퐁피두 센터에 이어 지난해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LVMH)에서 ‘샬로트 페리앙: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며’라는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되면서 그의 성취가 더욱 조명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최근 전시를 비롯 그에게 영감을 받은 향수 제품이 나오면서 페리앙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있는데요. 삼성물산 편집매장 10꼬르소꼬모 서울은 청담점에서 12월 13일까지 '샬롯 페리앙, 포토그래퍼 앤 디자이너' 전시를 열고 그의 사진 38점과 대표 디자인이 반영된 가구 15점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사진은 그의 작업의 바탕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생전에도 거의 공개된 적이 없답니다.

건축 비평가 로완 무어는 페리앙에 대해 "20세기 가장 기억에 남는 가구를 만든 디자이너"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대나무와 같은 전통재료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의적인 가구로 발명했다"며 "그만의 독특한 방식과 시선은 사진과 정치적 의견을 담은 몽타주, 3만실 규모의 스키 리조트 개발로 이어졌다"고 덧붙였지요. 가장 중요한 건 "페리앙이 창조와 삶의 기쁨을 믿었다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와의 만남, 이후 10년

샬롯 페리앙이 촬영한 사진과 디자인한 가구들. 삼성물산 제공

샬롯 페리앙이 촬영한 사진과 디자인한 가구들. 삼성물산 제공

1927년 페리앙은 파리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당시에도 잘 알려진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스튜디오에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건축분야에서 활동하는 여성이 드문 시대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쿠션에 자수를 놓지 않는다"라는 대답을 들어야 했죠. 페리앙은 자신의 명함을 놓고 나왔습니다. 결국 그 해가 가기 전, 르 코르뷔지에는 샬롱 도톤 전시회에 출품된 페리앙의 작품을 보고, 그 자리에서 그를 채용했다고 합니다.

페리앙은 1984년 한 인터뷰에서 "당시 르 코르뷔지에가 나를 채용한 것은 그의 아이디어를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기술에 익숙했고 나아가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도 있었다"고 회고했지요.

샬로트 페리앙의 대표작인 가구. 루이비통 홈페이지 캡처

샬로트 페리앙의 대표작인 가구. 루이비통 홈페이지 캡처


페리앙은 이후 10년간 르 코르뷔지에 사무실 소속으로 르 코르뷔지에와 그의 사촌인 피에르 잔느레와 협업을 하게 되는데요. 당시 가구들을 세세하게 디자인 한 게 페리앙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사랑 받고 있는 디자인인 'LC4 셰이즈 롱'도 이 때 탄생하게 되죠. 1928년 그가 의자에 누워 있는 사진은 지금까지도 회자가 되고 있는데요. 사진 속 페리앙은 강철과 크롬, 고무, 천을 조화시킨 제품에 다리 위치를 머리보다 높인 리클라이닝 모드로 누워 있습니다. 로완 무어는 "이는 삶과 디자인이 행복을 만든다는 그녀의 기본적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편 이번 국내 전시에서 소개되는 사진들은 페리앙이 1930년대 유럽 등지를 여행하는 동안 촬영한 것들입니다. 다리의 금속 구조물, 어망, 돌멩이 등 주의를 끄는 것은 무엇이든 녹음하고 기록하고 형태와 아이디어를 새기면서 디자인의 주제로 선정했다고 하네요.

일본에서 활동, 동양적 아름다움 적용하기도

샬롯 페리앙의 대표 사진 물고기의 척추골(Vertebre de poisson, 1933). 그는 물고기뼈, 돌 등 자연을 촬영하고 이를 디자인에 적용했다. 삼성물산 제공

샬롯 페리앙의 대표 사진 물고기의 척추골(Vertebre de poisson, 1933). 그는 물고기뼈, 돌 등 자연을 촬영하고 이를 디자인에 적용했다. 삼성물산 제공

페리앙은 1937년부터 르 코르뷔지에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건축가 겸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연인이 된 피에르 잔느레와 진보적 색채를 띠는 작업을 선보였다고 하는데요. 표준화된 산업용 부품으로 조립되는 저렴한 대량 생산 가구는 물론, 노동자들이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의 주택과 별장 공급을 위해 조립식 보금자리를 설계했다고 합니다. 세계 유명 경매회사 크리스티는 홈페이지를 통해 "페리앙은 이론보다 유용성에 초점을 맞추고 건축과 디자인을 사회 문제와도 연결시켰다"며 "저렴한 재료와 조립식 요소, 전통적인 기술 적용을 위해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이후 1940년 일본 정부의 산업 디자인 고문으로 초청받아 도쿄로 가게 되지요. 그는 1942년까지 그 곳에 머무르며 일본 전통 공예와 건축에서 여러 영감을 받고, 파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영국 인테리어 디자이너 일세 크로퍼드는 "페리앙의 가구 디자인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건 그녀의 깊은 지식 덕분"이라며 "전통적인 재료와 공예 기술, 지역 문화를 현대적 사고방식으로 결합했다"고 말합니다.

파리로 돌아온 이후 1951년에는 디자인 중심의 국제박람회인 밀라노 트리에날레 IX가구와 장식의 프랑스 부문 책임자를 맡게 되고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도쿄와 오사카에서는 에어프랑스 사무소를 재설계했는데요, 일본 공예품의 대나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습니다. 페리앙과 파리에 있는 일본 대사 주택의 인테리어를 함께 했던 건축가 준조 사카쿠라가의 "일본에서 근무했던 서구 디자이너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발언도 함께 전했지요.

1960년대 후반 경력의 절정, 스키 리조트

페리앙이 디자인한 스키 리조트. 위키피디아 캡처

페리앙이 디자인한 스키 리조트. 위키피디아 캡처


1960년대 후반에 완성된 프랑스 동부 사부아에 있는 레자크 스키 리조트는 표준화, 산업화, 산악 건축에 대한 그의 관심이 결합된 절정의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투숙객들이 야외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에 착안해 객실을 최소화하는 대신 습식 욕실과 주방을 활용해 효율성을 높였고, 장난스러워 보이는 디자인의 건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룬 게 특징인데요. 건물 위치 역시 산 허리 아래로 계단식으로 배열해 부지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했고, 많은 눈이 내리면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또 남쪽으로는 햇볕이 드는 테라스를, 북쪽으로는 경사진 표면이 눈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도록 디자인했지요. 1,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리프트도 필요하지 않도록 디자인 됐습니다.

페리앙의 열정은 나이가 들어서도 식지 않았죠. 1999년 숨질 때까지 3년간 런던의 디자인 뮤지엄, 도쿄의 리빙 디자인 센터 오존, 페르낭 레제 국립 박물관에서 3개의 주요 회고전을 큐레이팅 합니다. 이후 2019년에야 파리의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4개 층에 걸쳐 그를 기리는 회고전이 개최됐는데요, 가디언은 1920년대부터 70년 동안 가구와 사진, 건축 분야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를 만나볼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샬롯 페리앙. 삼성물산 제공

샬롯 페리앙. 삼성물산 제공

하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페리앙의 디자인 가운데 대중적으로 생산된 제품은 안타깝게도 없다고 합니다. 그는 구부러진 스틸 프레임으로 만든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긴 의자를 대량 생산하길 원했지만 제조업자와 논의 끝에 결국 무산되기도 했죠. 페리앙은 "푸조 자전거 회사와 협의를 시도했지만 30분 동안 아무것도 이해시키지 못하고 끝났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10년간 그 의자는 170개만 팔렸다고 하는데요,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 까시나에 의해 재생산 된 제품은 현재 약 580만원에 판매되고 있다고 하네요.

고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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