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아, 이리 좀 와봐"…친구의 마지막 생생
"그의 죽음 헛되지 않도록" 노동운동 불씨살려
"전태일은 노동의 자긍심을 심어준 선배"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어? 우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를 위해 죽었단 말이야?”
어린 여공은 믿을 수가 없었다. 평화시장 한가운데서 누가 불타 죽었다던 소식은 들었다. 사장은 분명 ‘웬 깡패 놈이 일하기 싫으니까 저런다’고 했다. 그가 불길 속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고 외쳤다는 것은, 핍박받는 여공들이 눈에 밟혀 몸을 내던졌다는 사실은 공장의 자욱한 먼지에 가려졌다. 배움이 고파 찾은 노동 교실에서, 여공은 그만 전태일의 진심이 담긴 일기를 읽고 말았다. 진실은 이숙희(67)씨를 ‘시다’에서 노동자로 서게 했다.
1970년 11월 13일. 스물셋의 재단사 전태일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외치며 분신했다. 그가 틔운 불씨는 노동자의 등불이 되어 50년 뒤인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 이씨를 비롯한 동대문 일대 봉제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열정을 우리의 삶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전태일 사후 치열하게 노동운동을 펼쳤던 청계피복노조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노동은 더 척박했을지도 모른다. 전태일의 친구들, 그리고 일면식도 없던 전태일의 후배들은 끈질기게 그의 뜻을 이어왔다. 한국일보는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전태일재단 사무실에서 이들을 만나 전태일 분신 이후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 죽음 헛되지 않게’ 태일의 당부에 조직한 청계피복노조
“그저 기가 막히죠.” 50년 전 일이지만 김영문(70)씨는 친구 태일이가 죽었던 그 순간만 생각하면 울컥한 마음이다. 돌이켜보면 태일이는 이미 각오했었다. ‘영문아. 이리 좀 와봐.’ 부르는 소리에 다가가 보니 이미 그의 몸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김씨는 너무 놀라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전태일이 병원으로 실려 간 뒤, 친구들은 이미 경찰에 빼앗긴 플래카드 대신 혈서를 들고 데모를 벌였다. 태일은 그런 그들에게 ‘나의 죽음을 헛되게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그 무거운 부탁에 ‘바보회’의 친구들은 2주 뒤인 11월 27일, 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함께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했다. ‘노동조건을 개선한다고 설치는 건 바보짓’이라 조롱받던 재단사들이 정말 노동조합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사람이 죽는다고, 노조가 생긴다고 근로기준법이 지켜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조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권리를 스스로 찾아 나갔다. 당시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휴일은 한 달에 단 이틀, 그마저도 성수기가 되면 사라지기 일쑤였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일요일엔 쉬어야 한다’고 외치며 공장 곳곳을 단속했다. 그들이 근처에 오면 공장장들이 불을 끄고 여공들의 입을 닫는 웃지 못할 풍경이 펼쳐졌다.
사장이 떼어먹은 노동자들의 돈을 되찾아준 것도 노조였다. 당시 시다가 하루 15~16시간을 일해 번 돈은 월 2,000~2,700원. 요즘으로 치면 20만원 남짓의 적은 돈마저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전태일의 친구이자 한때 청계피복노조의 위원장을 지냈던 임현재(72)씨는 말한다. “가장 화가 날 때는 하루아침에 해고하고선 그날 일한 돈이나 밀린 월급을 안 주는 경우였습니다. ‘지금은 돈이 없으니 다음에 받으러 오라’는 겁니다. 정작 다시 찾아가면 무시하기가 일쑤였죠.” 누군가가 그런 일을 당하면 임씨와 친구들은 그 공장 앞으로 우르르 몰려가 침묵시위를 했다고 한다. 노조의 손으로 근로기준법의 부재를 채우려는 ‘순진한 생각’이었다고 한다.
“우리 없으면 옷 못 입어” 자긍심 일깨워준 노동교실
“밤 열 시가 넘어서까지 일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임 선배님이 와서 ‘아니 왜 아직도 일을 시켜’ 하면서 전등 스위치를 탁 내리더라고요. 그 모습이 정말 멋있었죠.”
태일의 친구들이 이어간 꾸준한 노력은 당시 어린 여공이던 박태숙(61)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씨가 청계피복노조에 가입하게 된 건 ‘친구들을 만나볼래?’라는 다른 여공 언니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중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공장을 찾아온 박씨는 늘 친구와 배움이 고팠다. 노조가 마련한 ‘노동교실’은 그에게 또래와 함께 까르르 웃는 즐거움을 되찾아줬다.
당시 동대문 일대 봉제노동자 3만여명 중 80%가 초등학교 또는 중학교만 졸업한 여공이었다. 공장은 보다 싼 노동력을 찾았고, 오빠나 남동생의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힌 누이들이 그곳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노조는 이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아카시아회’ ‘네잎클로바회’ 같은 친목 모임을 만들었다. 1973년에는 평화시장 옥상에 ‘평화 새마을교실’이라는 야학을 만들어 배움의 열망을 채웠다. “처음 교실을 열었을 때 200명이 지원했는데 교실은 겨우 7평인 거에요. 겨우 줄이고 줄여서 25명씩 수업을 받았는데 그때도 책상을 빼고 겨우 앉았죠.” 이숙희가 회상했다.
여공들은 교실에서 국어와 역사를 공부했다. 학교에서만 하던 꽃꽂이는 물론 성교육까지도 노동교실이 대신했다. 여공들은 이곳에서 알았다. 가난의 대가인줄로만 알았던 고생이 실은 착취였다는 것을. 시다의 폐병은 불운이 아닌 좁은 공장과 섬유먼지를 방치한 사장의 책임이며, 하루 8시간 이상 일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법적 권리임을 말이다. 공장에서는 번호로, 공장 밖에선 ‘공순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여공에게 이름을 찾아준 것도 노동교실이다. 박태숙씨는 교실을 다니며 처음으로 자기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선배들은 ‘우리가 없으면 사람들은 옷을 못 입어’라고 말해줬어요. 우리의 노동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깨우쳐줬죠.”
봉제공장 사측과 박정희 정권이 청계피복노조를 탄압할 때 노동교실을 먼저 폐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1977년 9월 9일의 노동교실 탄압은 격렬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당시 검찰은 민주화운동가인 장기표씨의 재판정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이소선 여사를 구속했다. 경찰은 노조의 반발을 막기 위해 이 여사가 실장을 맡았던 노동교실도 폐쇄했다. 이때 노조원들은 경찰과 충돌하며 뼈가 부러지고 투신을 시도하는 등 말 그대로 ‘목숨’을 내걸며 교실을 지키려 했다.
당시 열 여덟 살이던 박씨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교실이 빼앗겼다는 소식에 건너편 건물 옥상 모서리를 붙잡고 어떻게든 올라가서 되찾으려 했어요. 혹여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에겐 그 교실이 전부였거든요.” 이날의 참상을 본 민주인사들은 이후 노동자와의 연대를 다짐하는 ‘한국노동인권헌장’을 발표했지만, 정작 노조는 지도부의 검거 및 도피로 조직력이 약해졌다.
"돈 앞에 사람은 여전히 도구 취급을 당한다"
4년 뒤 청계피복노조는 전두환 신군부의 ‘정화 조치’로 강제 해산을 당했다. 노조가 활동한 10여년 간 동대문 봉제공장의 노동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노동자의 출근시간은 아침 8시쯤으로 늘 비슷했지만, 퇴근시간은 밤 10~11시에서 저녁 8시로 앞당겨졌다.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단체협약’이라는걸 체결했다. 임금 협정을 통해 공임을 30% 인상하고 공임 책정 기준도 세웠다. 사장이 주는 대로 재단사가 받고, 그 재단사가 주는 대로 미싱사와 시다가 받는 주먹구구식 벌이가 점차 사라졌다.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 사람들은 노조란 ‘어용노조’만 있는 줄 알았다. 청계피복노조는 노동자들도 스스로 존엄을 지켜나갈 힘이 있다는 믿음을 처음으로 증명한 노조였다.
태일의 친구들은 이후 살길을 찾아 동대문을 떠나기도 했고, 봉제공장에 남았던 태일의 후배들은 노조를 다시 세워보려 노력하기도 했다. 어느 자리에서든 전태일을 잊지 않았던 청계피복노조의 옛 조합원들은 이제 그의 정신을 기리는 재단을 만들고 오늘날의 전태일들을 보듬고 있다. 하루 13시간 동안 패션스타일리스트들의 궃은 일을 대신하지만 ‘수습’이라는 이유로 월 40만원을 받는 어시스트들은 그 시절의 시다와 다름없고, 여공들이 사라진 창신동 반지하 봉제공장은 이주노동자들의 한숨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반세기나 지났는데도 지금의 노동현실은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올해만 무려 14명의 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현실은 암담하다. 박씨는 “단 한 명이 죽어도 큰일인데 회사(CJ대한통운)는 소속 택배기사 5명이 죽고 나서야 과로방지 대책을 내놨다”며 “사회 전체는 부유해졌을지 몰라도, 빈부 격차는 점점 커지면서 빈자는 더욱 살기 어려워진 것 같다”고 답답해했다. 임씨는 '나라가 잘살게 되고 기업이 커지면 노동조건도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을 버렸다. 그는 “세계 초일류기업이라는 삼성조차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권익을 신장하는 데는 인색하다”며 “노동자의 권리는 노동자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게 더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사람이라면 쉬어야 하고 먹는 시간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본적인 걸 해결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저 기계처럼 일하게 하고 있어요. 그러니 택배기사들도 죽고 태안화력발전소의 김용균씨도 목숨을 잃은 거죠." 이씨는 여전히 사람이 돈벌이 앞에 도구 취급을 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래서 그는 전태일재단을 찾아오는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전한다. “누군가는 청소노동자를 보고 ‘공부를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없다면 우리는 위생적인 도시를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누군가의 노동이 서로를 살게 합니다. 전태일 선배님은 노동자라면 누구든 사람으로 존중받는 세상을 위해 희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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