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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사라진 딸 찾아 20년... 가족이 '증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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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사라진 딸 찾아 20년... 가족이 '증발'됐다

입력
2020.11.10 09: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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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증발'. 인디스토리 제공

영화 '증발'. 인디스토리 제공


2000년 4월 4일 서울 망우동에서 6살 여자아이가 사라졌다. 제집처럼 드나들던 친구집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준원이는 어디로 간 걸까. 20년이 지났지만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됐는지는 여전히 일말의 단서도 없다.

12일 개봉하는 ‘증발’은 사라진 딸을 찾는 아빠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차분히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TV 르포 다큐 프로그램이라면 실종 사건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추적 과정에 집중하겠지만 이 영화는 실종 이후 남은 가족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촬영 기간만 4년, 기획과 편집까지 총 7년이 걸린 집념의 프로젝트를 완성한 주인공은 처음 장편영화를 내놓은 신인 김성민(39) 감독이다. 그가 장기실종 아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운명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그는 일반 직장생활과 조연출을 거쳐 늦은 나이에 감독 데뷔를 앞두고 있었으나 적당한 소재를 찾지 못해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실종된 사람을 애타게 찾아 헤매는 가족을 지켜봤던 옛 기억에서 불현듯 ‘실종 아동의 가족’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만난 김 감독은 “그 어머니의 절박함과 나의 절박함이 맞닿았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실종아동전문기관을 통해 소개받은 장기실종 아동 가족 가운데서 그의 시선을 끈 사람은 준원이 아버지 최용진씨였다. 김 감독은 “처음 만났을 때 마치 녹음기 재생 버튼을 눌러 녹음 내용을 듣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인터뷰. 다른 실종 아동 부모가 이야기 끝에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던 것과 달리 최씨는 끝까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김 감독은 “준원이 아버님은 자기 세계를 단단히 구축한 것 같았다”고 했다. 당초 두 가족의 이야기로 만들려던 영화는 준원이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영화 '증발'. 왼쪽에서 두번째가 실종자 최준원의 아버지 최용진씨. 인디스토리 제공

영화 '증발'. 왼쪽에서 두번째가 실종자 최준원의 아버지 최용진씨. 인디스토리 제공


최씨는 세 딸 중 둘째 준원이가 실종된 이후 직장도 그만두고 지난 20년간 전국을 찾아 헤맸다. 전단지 배포는 물론, 방송 출연에 미인가 시설 수색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일부러 이사도 가지 않고 전화번호도 바꾸지 않았다. 그간의 기록을 빼곡히 정리한 노트만 5권. 온갖 불확실한 제보와 파렴치한 장난전화를 받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최씨는 “(김 감독의 제안에) 반년 이상 고민을 했는데 그의 열정과 진정성에 마음을 열게 됐다”고 했다.

‘증발’은 준원이를 찾아 다니는 최씨의 이야기에서 점차 가족 이야기로 넓어진다. 과거 최씨와 함께 TV 방송에 출연했던 준원이 어머니는 왜 안 보이는지, 준원이 언니인 장녀 준선씨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등등. ‘증발’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은 아이의 증발로 인해 가족 또한 서서히 증발한다는 대목이다. 김 감독은 인터뷰가 가족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심리전문가의 자문을 받기도 했다.

카메라 앞에 선 가족은 내밀한 속마음을 조금씩 드러낸다.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준선씨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아빠는 좀 벌 받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김 감독은 영화 촬영을 위해 1년 넘게 최씨 집안을 드나든 뒤에야 준선씨의 허락을 받고 그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다. 준원이 어머니는 4년 7개월여 만에 김 감독에게 인터뷰를 허락했다.

촬영 도중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기도 했다. 촬영을 시작한 지 2년 만인 2016년 경찰청에 장기실종수사팀이 신설돼 사건 발생 17년 만에 재수사에 들어간 것. 어렵사리 촬영 허가를 받은 그는 이듬해부터 강성우 반장과 함께 전국 곳곳을 다니며 수사 과정을 담았다. 영화가 미스터리 스릴러 같은 장르로 잠시 탈바꿈하며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대목이다. 실제로 강반장은 뒤늦은 출생신고, 의심쩍은 가족관계, 닮은 외모 등 정황상 준원이가 아닐까 싶은 사람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영화 '증발'을 연출한 김성민 감독. 인디스토리 제공

영화 '증발'을 연출한 김성민 감독. 인디스토리 제공


이 많은 이야기를 두 시간에 담아내는 일은 김 감독에게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그는 “감독이라는 권한으로 어느 정도까지 내밀함을 드러낼 수 있을지, 잘못된 선택으로 영화 공개 후 부작용이 생기지나 않을지 윤리적인 고민이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고 했다. 김 감독은 최씨 가족의 상처에 깊게 들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내상을 겪고 영화 제작 기간 촬영 외적인 문제까지 겹쳐 심리치료를 받기에 이르렀다.

몇 번씩이나 촬영을 그만두고픈 마음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붙잡은 건 최씨 가족이 어려운 결정 끝에 열어준 마음과 귀한 시간들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죽어도 완성을 해야 했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는 소재인 탓에 수많은 고민 속에서 2년간의 편집과 재편집 기간 나온 버전만 13개. “촬영하고 편집하던 6년간 제대로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는 그는 “촬영 중에 결혼했는데 불면증에 시달리는 나 때문에 아내가 많이 힘들어 해서 무척 미안했다”고 했다.

최씨가 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듯 이 영화도 최씨 가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회복될 수 없을 것 같던 최씨와 준선씨의 관계도 촬영이 영화가 끝나갈 무렵엔 조금씩 가까워진다. '증발'은 지난해 9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돼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고 이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했다. 김 감독은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본 준원이 어머님이 고맙다고 말해주고, 막내가 언니 준선씨를 뒤늦게 이해하게 됐다는 말을 해줬을 때가 수상보다 더 기뻤다”고 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바라는 건 ‘공감’이라고 했다. “영화가 뭔가를 가르친다는 느낌을 주는 건 너무 싫습니다. 이 가족을 도와달라는 식으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단지 그동안 몰랐던 세계를 간접 경험하며 이 가족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공감하셨으면 합니다. 그런 공감이 모이면 실종 아동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그 관심이 제도 개선으로 또 이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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