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지난해 저는 15년간 산 남편과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나가질 않습니다. 처음에는 가진 게 없고 아이들과 헤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며 나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제 집처럼 삽니다. 이제 그만 나가라고 싸우기도, 달래보기도 했지만 알아서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버팁니다.
법적 조치도 알아봤지만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남편에 대해선 그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지만,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두 아들을 생각하면 경찰까지 불러야 할까 싶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아빠가 문제라는 것, 그리고 이혼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아이들도 아빠와 살고 싶어하지 않고요.
하지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아이들은 모르지만, 큰아이가 실은 제가 낳은 아이가 아닙니다. 유부남이었던 남편은 당시 갓난아이를 데리고 이혼소송 중이었고, 저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 사람을 좋아하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갓난아이를 돌보는 모습이 다정해 보였고, 내가 다시 상처를 주고 싶지 않기도 했습니다. 큰아이는 돌이 지나면서 저를 엄마라고 불렀고, 저도 좋은 엄마가 되자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뒤 남편이 가정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됐고, 많은 일을 겪으면서 10년 전부터 이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남편이 음주운전으로 구속되면서 이혼 결심을 굳혔고, 남편의 외도까지 알게 되면서 이혼했습니다.
저의 부모님도 이혼했습니다. 큰 문제는 없었는데 제가 대학생 때 아버지가 낯선 여성을 집에 데려왔고, 어머니는 부엌 어딘가에서 울고 있었어요. 그 뒤 아버지는 술 주정을 부리며 어머니를 괴롭혔고, 결국 두 분은 이혼했습니다. 제가 결혼한 뒤 아버지는 제게 전화해서 저를 몹시 비난했습니다. 그 일로 저와 아버지는 인연을 끊었습니다. 가끔 동생을 통해 소식을 듣는 정도입니다. 어머니에게 저는 결혼 전에는 자랑스러운 딸이었고 지금도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친구같이 지냅니다.
저는 남편과 깨끗하게 정리하고 두 아이와 잘 살고 싶습니다. 저는 큰아이를 ‘내 시간과 인내와 노력으로 키운 아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낳은 둘째를 같이 기르면서 솔직히 차별하는 마음이 생긴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처음 다짐을 되새기며 차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큰아이는 똑같은 제 아들이고, 제가 키울 겁니다. 남편만 당장 내쫓아버릴 수 있다면 세 식구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효진(가명ㆍ47ㆍ회사원)
효진씨, 당신의 인생을 충분히 다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큰아이를 당신 아들로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저는 당신이 아주 고귀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은 두 아이를 차별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아주 훌륭한 엄마입니다.
큰아이가 행여나 준비되지 않은 채로 엄마가 낳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아이들이 경찰에 아버지가 끌려나가는 모습에 상처 입을까 염려해서 남편과의 관계를 잘 마무리하려는 고민 또한 당신의 훌륭한 면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혹자는 당신이 너무 여리고, 결단을 못 내리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걱정스러운 점은 있어요. 저는 당신이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 같아요. 낭떠러지는 바로 직전까지는 평지 같아요. 한 발만 더 내밀면 깊은 바닥으로 뚝 떨어집니다. 싫으면 싫다고 하고, 중간쯤에서 경고도 하고, 상대방과 감정을 주고 받고,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는 과정들이 많이 생략된 건 같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낭떠러지로 툭 떨어지듯 관계를 끊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어요.
효진씨의 아버지만 해도, 물론 외도나 술 문제 등의 잘못은 있지만 당신을 학대하거나 당신과 직접 충돌은 많이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혼 뒤 비난 전화를 했다 해서 당신이 무 자르듯 아버지와의 인연을 뚝 끊은 이유가 뭘까요. 아버지가 당신에게 깊은 상처를 줘서 일까요.
제 생각에 효진씨는 특정 이유로 인연을 끊기보다 어느 순간,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싶을 때 관계를 단절하는 것 같아요. 책임감으로 유지하다 어느 순간 부담감이 압도하면 관계를 차단하죠. 남편과 이혼도 그랬을 거예요. 당신 스스로 정한 ‘내가 이거는 받아들일 수 없겠다’는, 내면의 선을 남편이 어겼고 그래서 이혼을 결심했을 겁니다.
효진씨는 그 기준 이전까지는 사력을 다해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아요. 불편하더라도 되도록 묵묵히 견뎌내고 성실하게 책임을 다했을 거예요. 그전까지 최선을 다했기에 마지막에 단절을 택하고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유부단한 게 아니라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버티다가 일정 선을 넘어서면 단절을 택하는데, 그 과정을 거쳐야 정당함을 얻어 당신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지요. 당신은 수동적인 형태로 참았다가, 선을 넘으면 아주 적극적으로 관계를 끊는 것 같아요.
그런 당신이 잘못됐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남편을 두둔하려는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그것을 겪고,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과정에 그런 특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당신의 삶이 더 편안할 것 같습니다.
당신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선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그 선을 넘어가면 다른 이들과도 단절될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큰아이와의 관계에서도 당신은 여지껏 잘해 왔지만, 앞으로 수많은 일이 생겼을 때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가장 크게 우려하는 부분은, 아이가 그 선을 넘었을 때 효진씨가 ‘나는 최선을 다해서 키웠어, 아이와의 관계가 여기까지인가 보다, 더 이상 자신이 없다’며 아이와 단절할 가능성이에요. 큰아이에 대한 당신의 깊고 따뜻한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을 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요.
그렇기에 당신은 자신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조언해 봅니다. 그리고 평소에도 자주 당신의 부정적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참다 참다 단절하는 게 당신에겐 할 만큼 했으니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상대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 있어요. 상대는 당신이 겪은 고통이나감정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선에 도달하기 전, 당신이 느끼는 불편함과 고통, 감정과 생각을 상대에게 분명히 전달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까운 가족에겐 특히 그래야 해요.
집에서 안 나가는 남편에게 불편한 감정을 표현한다고 해서 그가 당장 나가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계속해서 이게 얼마나 불편하고, 그 때문에 내가 무슨 고민까지 하는지를 분명히 얘기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어요.
남편에게 아주 진지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세요. “경찰을 불러서라도 당장 당신을 내쫓고 싶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당신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아이들이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이런 나의 고민을 이용해 우리 집에 계속 살 생각은 하지 마라. 큰아이는 내가 키웠고, 내가 우주에서 유일한 엄마다. 당신이 아이들 아빠인 것 또한 인정하고, 아이들 문제는 당신과 상의하겠다. 그러니 당신이 정말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어서 빨리 이 집에서 나가 주길 바란다.” 이렇게 말해 보세요.
남편이 당장 집을 나가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얘기하면서 내보내는 것과, 무조건 견디다가 끌어내는 것은 다를 거예요.
큰아이에게 당신이 친모가 아니라는 사실은 성인이 된 뒤 직접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이 엄마가 되기로 했을 때 아이를 직접 낳고 안 낳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과 상관없이 엄마라는 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럼에도 얘기하는 것은 혹여 다른 사람한테 들었을 때 네가 혼란스럽거나 힘들까 봐 그런 것이다, 나는 여전히 네 엄마다라고 따뜻하고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효진씨, 저는 당신이 인간으로서 고귀함을 가지고 아이들을 오랜 기간 최선을 다해서 키워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신이 너무나 훌륭한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아이들이 잘 크고 있지만, 앞으로 혹시라고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면, 당신 내면 안에 있는 그런 특징들을 잘 살펴보시고, 아이들과 자유롭고 행복하게 지내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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