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다영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매주 한 편씩,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최근 방영중인 드라마 ‘구미호뎐’에서, 주인공 구미호는 이전 생에서 비극으로 끝난 첫사랑의 환생을 600년 동안 기다린 끝에 다시 만난다. 이 감격스러운 순간, 문득 드는 의문 하나.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이란 이유로, 지금 다시 만나 반드시 사랑하게 되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어릴 적 첫사랑, 다 커서 만나봐야 별 볼 일 없지 않던가. 차라리 추억으로 남겨두는게 더 나았다며 후회가 되진 않을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전생의 기억이 소멸된다는 것. 전생의 사랑을 이생에서 다시 만난다는 건 우리가 결국 같은 실수를 거듭 반복하는 존재라는 자백 같은 게 아닐까. 차라리 안 만나는게, 다시 사랑하지 않는게 더 낫지 않을까.
문학과사회 2020 여름호에 실린 우다영의 단편 ‘태초의 선함에 따르면’은 이 의문의 정 반대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었다. 전생의 모든 기억을, 잊는 게 아니라 전부 떠올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상황에 맞부딪히게 될까.
남태평양 사모아제도에서 ‘아즈깔’이라는 신비의 풀이 발견된다. 이 풀의 독성에 노출된 사람은 지금껏 이어온 전생을 모두 기억하게 된다. ‘각성자’라 불리는 이들은 전생의 기억 뿐 아니라, 전생에 익혔던 기술과 능력까지 고스란히 되살려낼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고지능, 고능력의 인간이다.
무한하고 방대한 경험, 지식, 능력을 갖춘 각성자이건만, 이들은 불행하다. 이전 생에서 그들 모두, 언제나 매순간 좋은 사람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를 무려 서른 여섯 번의 전생에서 모두 강간하고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아이들이 여러 생에 거쳐 자신을 죽인 살인자들이란 걸 알게 된다. 무한한 윤회의 삶에서 증오와 사랑 또한 무한하게 반복해온 각성자들은, 역설적으로 사랑도 증오도 그 어떤 감정도 희미해진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삶이란 거대한 패턴의 반복일 뿐이란 사실을 알아채버린 인간에게, 지금 여기서 산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소설을 읽어나가다 삶 자체가 허무해질 무렵, 작가는 독자를 위해 아름다운 장면 하나를 마련해뒀다. 규칙적인 엄격한 패턴으로 ‘둘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던 한 연인이 단 한 번의 생에서 사랑을 이룬다. 이 사랑을 성사시켜주는 이는 그들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삶이 비록 그런 것이라 해도, 인간은 늘 예측 불가능하며, 그로 인해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삶을 거듭 살아내는 것 또한 그렇게 허망하지만은 않다는 암시처럼 읽힌다.
얼마전 우리 곁을 떠난 고 박지선씨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다음 생에도 나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진정 그리 되길 기원한다. 그리고 그 생은 부디 이번 생보다 덜 아픈 생이기를,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준 만큼 그 자신도 충분히 기쁜 생이기를 바란다. 같은 이유로 다음 생에는 엄마가 나의 딸로, 내 고양이가 나로 태어나기를 또한 바란다. 이 단편을 읽다보니, 거듭되는 생 중에서 한번쯤은 그래도 이 생에서 빚진 사랑을 갚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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