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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침묵은 ‘독’이다

입력
2020.11.25 18:00
수정
2020.11.25 18:26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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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추미애-윤석열, 사생결단에도 “…”
임기 내내 논란마다 입 닫는 대통령
국가지도자로서 책임 방기 아닌가

국가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의 침묵은 분열의 씨앗이 되기 십상이다. 사진은 17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국가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의 침묵은 분열의 씨앗이 되기 십상이다. 사진은 17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해 국민의례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 대선에 도전한 2012년의 일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정치 원로에게 만나자고 청했다. 두 시간여 얘기를 나눴다.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별 연이 없던 데다 반대 진영의 인사로 여겨졌기에 의외였다. 극구 고사했던 원로는 “나라를 위해 뭐라도 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분 아니시냐”는 대통령의 말에 마음을 바꿨다. “그렇다면 국정의 큰 그림을 미리 그릴 수 있는 역할은 내가 할 수 있겠다”는 역제안과 함께다. 대통령도 필요성에 공감하며 “국가발전전략을 구상하는 특위를 바로 만들겠다”며 수락하곤 돌아갔다고 한다.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났다. 대통령에게선 가타부타 연락이 없었다. 캠프 안팎의 ‘친노’ 그룹이 거세게 반대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럼 그런 사정을 설명해 주겠지.’ 기다렸지만, 대통령은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른 문제로 대면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그 얘긴 꺼내지 않더란다.

임기 중 주요 논란 때 문 대통령의 처신을 보며 떠오른 일화다. 공당의 후보로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공인이 그러면 안 됐다. 반대 여론에 부딪혔다면 설득해야 했고, 역부족이라 실패했다면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에 사과해야 했다. 그게 책임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택한 건 입을 닫는 거였다.

그래도 백 번 양보해 그때의 침묵은 사감(私感)을 건드린 무례함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라면 달라진다. 국가 공동체의 운명이 그의 입에 달려 있다. 조정과 중재, 대화와 설득은 그래서 지도자의 중요한 자질이다. 그게 정치이며, 정치의 정점인 대통령 리더십의 핵이다. 그 책임을 방기하고 침묵할 때 분열의 씨앗에서 싹이 튼다.

대통령 집권 이후가 이미 이를 방증했다. 올해만 하더라도 여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잇단 성폭력 사건이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겼지만, 대통령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나아가 여당이 내년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겠다며 합리적 절차도, 명분도 없이 당의 헌법을 뒤집는데도 대통령은 가만히 있었다.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의 잘못으로 치러지는 선거엔 무공천한다’는 그 당헌은 대통령이 ‘창시’한 것이다.

절정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생결단식 대결조차 대통령이 두고 봐 온 것이다. 모두 대통령이 임명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다. 대통령의 침묵 속에서 국민은 두 사람이 사사건건 충돌하고 대립하는 싸움을 1년 내내 중계방송 보듯 관전해야 했다. 끝내 추 장관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검찰총장의 직무정지를 명령해 파국으로 치달았는데도 대통령은 말이 없다. 이제는 현직 검찰총장과 법무부 간의 송사(訟事)까지 지켜봐야 할 판이다.

‘대통령의 자격’이라는 책이 있다. 청와대 대변인과 각료, 국회의원을 지낸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썼다. 대통령과 대선 후보들을 도와본 경험에서 길어냈다.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는 능력’과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은 별개며, 전자보다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윤 전 장관은 말한다. ‘국가 흥망성쇠의 제반 요인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면서 결정을 내리고, 나아가 결정 과정 자체를 관리하는 자질과 능력’이 관건이라는 얘기다. 창업(創業)보다 수성(守成)이 어려운 법인데, 한국 사회 주요 지도자들의 능력은 창업에 치우쳐 있다는 맹점을 지적한 것이다. 대통령의 힘은 그러니까, 결정권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결정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청와대는 “침묵도 메시지”라고 포장하는 모양이다. 틀렸다. 지도자의 침묵은 직무유기이며 책임방기다. 그러니 대통령의 침묵은 금이 아니라 악이다.


김지은 인스플로러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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