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직접 자신의 정치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국민자치이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는 근대적인 정치 환경에서 민주주의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대리자를 통한 간접적 지배인 대의제적 요소를 포함하게 되었다. 국민 개인이 대리자에게 주권을 양도하는 것은 사회계약론 측면에서 사회적 안정과 통합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오늘날 이러한 대의민주주의는 최선의 정치체제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디지털혁명과 4차 산업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물리적, 디지털적, 생물학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어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대의제의 필요성이 약화되어가고 있다.
더욱이 대의제에서 선출직 후보자를 발굴ㆍ양성하는 정당과 국민들의 입법주권을 대표하는 의회의 역할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한국의 정당과 국회는 다른 주요 기관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신뢰를 받고 있다. 기존 일련의 조사뿐만 아니라 2016년 박근혜 국정농단사태 및 이후 검찰개혁, 조세저항, 부동산규제 반대 등 여러 한국 사회의 갈등에 대한 국민들의 목소리가 국회의원이나 정당이 아닌 광화문에서 표출되는 것에서도 그러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효율성과 정치적 전문성의 측면에서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할 정치체제를 찾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살펴봄으로써 현 정치체제가 처한 상황을 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 국민들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외면하는 것인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한국리서치가 10월 16일 ~ 19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대의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한국의 정치, 국민의 만족도는 10점 만점에 평균 3.84점에 불과
한국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만족도는 어떠할까. “한국 정치는 잘 이루어지고 있다”에 동의하는 정도를 살펴본 결과 10점 만점의 응답에서 한국 정치에 대한 국민의 만족도는 평균 3.84점으로 중간인 5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연령대별로 구분하여 볼 때, 20대 이하의 현 정치에 대한 만족도는 4.42점, 30대는 4.30점, 40대는 4.06점, 50대는 3.70점, 60대 이상은 3.12점으로 연령이 높을수록 낮아졌다. 이는 한국 정치 전반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상당히 부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한국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의 원인은 무엇일까.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각 기관에 대한 평가, 현 정권에 대한 지지여부, 그리고 시의적인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의견 등 단기적인 요인과 정치체제나 제도에 대한 인식 등 장기적인 요인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대의제에 중점을 두어 장기적인 요인인 제도에 대한 인식과 단기적인 기관에 대한 인식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국민이 원하는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보다 ‘강한 리더 중심형 통치’ 선호가 우세
국민이 원하는 민주주의의 형태는 ‘직접민주주의’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이 직접 통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와 정치적 대리인들이 활동하는 대의민주주의, 그리고 강한 리더 중심의 통치에 대한 선호도를 각각 질문한 결과 현 정치체제인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선호가 가장 낮았다. 직접민주주의는 10점 만점에 평균 6.73점으로 가장 높았으며, 대의민주주의는 4.09점으로 세 통치형태 중 가장 낮게 나타났다. 이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대의민주주의 자체가 국민에게 외면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령대별로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해서는 40-50대의 선호가 가장 높았으며, 대의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오히려 20대 이하가 가장 많이 선호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대의민주주의가 국민들에게 외면 받고 있으나 20~30대 젊은층에서 선호가 나타나고 있는 만큼 신뢰를 회복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조심스럽게 평가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흥미롭게도 강한 리더 중심의 정치가 현 정치체제인 대의민주주의보다 평균 1.45점이나 높은 응답을 받았다. 특히 50대, 60대에서 이러한 선호가 가장 크게 나타났다. 강한 리더 중심의 정치가 권위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권위주의적 통치상황 하에서 민주화를 겪은 60년대 생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리더에 대한 요구가 높다는 점은 세대효과보다 연령효과가 국민들에게 더욱 크게 작용하는 것인지, 혹은 현 정치체제에 대한 불만이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요구로 표출되는 것인지 추가적인 분석과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정당과 정치인의 대표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대의제 기관에 대한 신뢰도 다른 기관에 비해 가장 낮은 수준
대의제 기관인 정치인과 정당의 대표성에 중점을 두어 국민의 인식을 조사한 결과에서는 두 기관에 대한 평가 모두 부정적이었으며 특히 정당보다 정치인의 대표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정치인의 대표성에 대한 평가가 10점 만점에 평균 2.95점, 정당의 대표성에 대한 평가가 3.89점이었다.
대표성뿐만 아니라 기관에 대한 신뢰도 대의제 기관이 다른 기관에 비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행정기관에 해당하는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신뢰는 10점 만점에 각각 평균 4.68점, 4.81점으로 높은 수준이었으며, 뒤이어 사법기관인 법원과 판사, 검사에 대한 신뢰도 평균 3.47점, 3.50점, 3.32점의 신뢰수준으로 나타났다. 한편 대의기관인 국회와 국회의원, 정당에 대한 신뢰는 다른 기관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국회가 평균 3.13점으로 3점대를 나타냈으며, 뒤이어 정당이 2.90점, 그리고 국회의원이 2.49점으로 가장 낮은 신뢰를 받았다. 국회의원의 신뢰수준은 대통령에 대한 신뢰수준의 절반에 불과하였다.
한국의 대의민주주의 진정으로 위기인가?
조사결과 국민의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선호는 낮은 수준이며, 신뢰와 대표성에 대한 평가도 낮았다. 이렇듯 오늘날 한국의 대의민주주의는 위기에 놓여있다. 하지만 올 4월 15일 치러진 제2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국민들은 66.2%라는 2000년대 최고의 투표 참여율을 보여주었다. 정치적 대리자를 선출하는 투표에 대한 참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가 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국민의 정치체제에 대한 선호와 실제 정치참여 간에는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국민에게 외면받는 대의민주주의가 실제로 위기에 놓여있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로 발전되고 있는 것인지 지속적인 조사 연구를 통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김진주 명지대학교 미래정책센터 연구교수
박정석 한국리서치 여론조사 사업본부 차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