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박일근 논설위원이 살아 숨쉬는 우리 경제의 산업 현장과 부동산 시장을 직접 찾아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무려 20여명이 바로 계약을 하고 싶다며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하네요. 저마다 딱한 사정을 호소하고 있어 저희도 난감하고 집주인도 고민중입니다.”
서울 강남에서 복덕방을 운영하고 있는 A씨는 최근 보증금 9억원짜리 전세 물건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밤낮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몸살을 앓았다. 전용 84㎡ 아파트 기준 이 동네 전세는 지난달 실거래가가 13억원, 현재 호가는 14억5,000만원까지 나오고 있다. 그나마 전세는 물건 자체가 거의 없고, 보증금 8억~10억원에 월세 120만~180만원 물건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시세보다 4억원 이상 낮은 전세가 뜨니 눈이 휘둥그레진 임차인들이 너도나도 달려든 것. 알고 보니 집주인은 주택임대사업자였다. 주택임대사업자의 등록 물건은 임대료 인상 시 기존 임대료의 5%를 초과할 수 없다. 이를 위반하면 과태료 3,000만원이 부과된다. 집주인은 주택임대사업자 의무사항을 지키기 위해 보증금을 2년 전보다 5% 가까이 올려 9억원에 내 놨지만 최근 몇 달 사이 주변 전셋값이 폭등하며 이 물건은 ‘로또 전세’가 됐다. 20여명의 후보 중 누굴 세입자로 선택하느냐는 온전히 집주인 마음이다. 을인 임차인을 위한 취지의 임대차법이 오히려 갑인 집주인의 지위만 더 높여준 결과를 낳았다. 정부가 집값 상승의 주범이라며 순차적으로 폐지하기로 한 주택임대사업자의 등록 물건이 전세대란의 구세주가 된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중랑구도 신축 전세 10억 호가
"집주인이 10억원 아니면 전세 계약을 안 하겠다고 합니다. 저희도 황당합니다."
미친 전셋값은 강남을 넘어 마용성(마포 용산 성동구)은 물론이고 노도강(노원 도봉 강북구) 등 사실상 서울 전역으로 확산된 상태다. 특히 신축 아파트 전세는 부르는 게 값이다. 그 동안 중랑구 면목동은 부동산 관련 기사에선 언급조차 되지 않던 지역이다. 서울 25개 자치구 중 아파트 값이 가장 낮은 곳 중 하나다. 그러나 지난 7월 1,505가구의 사가정센트럴아이파크가 입주한 뒤 분위기가 바뀌었다. 국토부에 신고된 전용 84㎡ 실거래가는 지난 6월 11억5,000여만원이 마지막이지만 최근 호가는 14억원을 넘나들고 있다. 심지어 전세 호가는 10억원까지 나오고 있다. 3일 이 아파트 앞 B부동산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전세 8억원 물건은 다 나가고 10억원짜리만 하나 남아 있다"며 "시세가 8억원이니 8억5,000만원 정도에 계약을 하자고 집주인을 설득해도 막무가내"라고 말했다.
이런 아파트의 전세가 상승은 주변 시세까지 밀어 올리고 있다. 사가정센트럴아이파크 바로 옆 면목두산아파트(4,5단지)의 매매가는 올초 6억원에서 최근 8억원까지 뛰었고, 월세 물건은 보증금 5억원에 30만원까지 나오고 있다. 전세는 없다.
학원가는 강남·북 가리지 않고 극심
"전세 20억원 물건은 엊그제 나오자마자 계약됐어요. 대기 걸어 놔야 해요."
전세난은 학원 수요가 큰 곳에서 더 심하다. 전세가 20억원을 넘었다고 해 화제가 된 서울 강남구 래미안대치팰리스 앞 C복덕방 관계자는 1일 "네이버에 떠 있는 매물은 이미 나갔고 지금은 보증금 12억원에 월세 350만원짜리만 있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는 대치동에서도 학원이 가장 밀집한 곳에 자리한 신축급(5년차) 단지여서 평상시도 매물이 많지 않다. 여기에 자립형 사립고와 외고 등을 폐지하겠다는 정부 발표로 수요는 더 커졌는데 임대차법까지 시행되니 20억원에도 전세가 없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강북 학원가도 다르지 않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 청구3차(24년차) 84㎡ 아파트 전세는 최근 8억9,000만원(15층)까지 나오고 있다. 10월엔 5억6,000만원(5층)에 거래된 곳이다. 2일 중계동 학원사거리 부근에서 만난 공인중개사 D씨는 "계절적 수요 등 복합적 요인이 있지만 임대차법 시행으로 계약 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늘어난 영향이 가장 큰 편"이라고 말했다.
전세난 내후년까지 계속
문제는 이러한 전세대란이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란 데 있다. 이미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해 살고 있는 임차인이 갑자기 나갈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D씨는 "전세 물량은 이번에 행사된 계약갱신청구권이 만료되는 내후년 8월 이후에나 나오기 시작할 것"이라며 “내후년까지는 전세난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게 산수"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내년엔 아파트 신규 공급이 올해보다도 적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내년 서울 아파트 신규 입주 물량은 올해(5만여가구)의 절반인 2만5,000여가구에 불과하다. 2022년엔 1만7,000가구로 더 줄어든다. 10년래 가장 적다. 전세난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
현장에선 전세가가 급등하며 매매가와의 차이가 줄자 다시 갭투자가 살아나고 있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전셋값 상승이 매매가를 밀어 올리고 집값은 다시 보증금 인상을 부르는 악순환이 최악의 시나리오다. 답이 없는 젊은층이 경매로 눈을 돌리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경매로 달려가는 2030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열린 지난 3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별관 211호 경매법정. 집행관의 입찰 설명이 끝나자 100여명의 응찰자가 기일 입찰표와 황색 입찰봉투, 흰색 매수신청 보증 봉투를 받기 위해 법대 앞으로 몰려갔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백팩을 멘 20대와 30대, 두 손을 꼭 잡은 젊은 부부들이 절반 가까이 돼 보였다. 법정 밖 복도에도 경매 동아리와 학원 등에서 온 듯한 2030 초보자들이 7~9명씩 둘러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입찰가를 상의했다. 경매잔금 대출광고 명함을 나눠주던 최모 실장은 "경매 물건 수가 많지 않은 날인데도 응찰자가 꽤 많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이날 상도동 힐스테이트프레스티지 방 3개 전용 60㎡ 아파트엔 무려 23명이 달려 들었다. 결국 감정가 8억2,200만원을 훌쩍 넘긴 10억4,600여만원에 낙찰됐다. 감정가 대비 낙찰가 비율인 낙찰가율이 127%에 달한 건 이례적 일이다. 오명원 지지옥션 선임은 "미친 아파트값에 전세도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경매를 통해서라도 시세보다 좀 더 저렴하게 집을 마련해 보려는 젊은층의 참여가 늘고 있다"며 “그러나 권리관계와 자금력을 충분히 따지지 않은 채 응찰했다 낭패에 빠질 수도 있는 만큼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값 잡아야 전세난도 해소
해결책은 없을까. 가장 암울한 건 전세난의 원인이 된 정부 부동산 정책의 기조가 바뀔 낌새는 전혀 없다는 데 있다. 김현동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장은 4일 "4년 전부터 집값이 뛰고 지난해부터 전셋값이 오르는 상황에서 6·17 대책, 7·10 대책 등이 안 먹히자 ‘세종시로 수도를 옮기겠다’ ‘그린벨트를 풀겠다’고 얘기하다 느닷없이 180석의 위력을 과시해 임대차법을 시행해버렸다"며 "이로 인해 전세 대란이 벌어지고 국민 90%가 분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임대차 시장은 매매와 달리 가수요가 없는 만큼 정부가 개입할 필요도, 개입해서도 안 된다"며 "국면 전환을 위해 국토부장관만 바꿀 게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고 실태부터 정확히 파악한 뒤 대통령이 공언한 대로 집값을 잡아야 전세난도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여년 간 복덕방을 운영했다는 한 중개사는 "파이프의 양쪽을 모두 막으면 물이 어떻게 흐를 수 있겠느냐"며 "보유세를 높인 만큼 거래세인 양도소득세는 한시적으로 낮춰 다주택자와 주택임대사업자의 매물이 나올 수 있도록 해줘야 부작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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