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갑옷을 입지 않은 인간은 나약하다. 맹수는 둘째치고, 지구상에는 인간이 맨몸으로 이길 수 있는 동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안 좋은 조건을 인간은 협력과 도구의 발달을 통해서 극복한다. 그리고 그 끝에 문명이 있다.
문명 이전의 인간은 다양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불안정한 상황은 인간으로 하여금 강자의 가호를 요청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神)의 출현이다. 유신론적 종교는 신을 중심으로 신에 대한 믿음과 구원이라는 방식으로 확립된다. 이런 점에서 유신론의 기원은 멀리 선사시대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 인간은 신에 대한 비중을 줄이고 점차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등장하는 것이 신을 대체하는 '진리'다.
유·불·도의 동아시아 종교는 모두 진리를 추구한다. 이 진리는 과학이 추구하는 귀납적 진리가 아닌 연역적 진리로, 인간의 행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점에서 동양 종교 역시 과학은 아니다.
그러나 신이 인격적 존재로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달리, 진리는 법칙적이기 때문에 판단이 가능하다. 이로 인해 동양 종교는 철학, 즉 인문학의 영역에서도 다루어진다. 이런 진리를 유교에서는 '인(仁)', 불교에서는 '법(法)', 도교에서는 '도(道)'라 칭한다. 인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하는 본연의 공통 윤리이며, 법은 법칙 즉 보편의 원칙이다. 그리고 도 역시 법과 유사한 원리적인 질서를 가리킨다.
다산은 '논어고금주'에서 인을 '이인상여(二人相與)' 즉 두 사람이 서로 함께하는 인본적 가치로 풀이했다. 그리고 붓다는 법을 영속하는 법칙이며, 당신은 이러한 진리를 발견한 발견자이자 체득자로 규정한다. 끝으로 '노자' 제4장에서 도는 하느님보다도 먼저 존재했던 '상제지선(象帝之先)'의 가치로 규정된다. 유신적 종교가 신 중심적이라면, 진리 의존적 종교의 핵심에는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진리 중심의 종교에서는 교조보다도 진리가 우선되며, 교조는 진리의 체득자로 일종의 롤모델과 같은 위상을 점할 뿐이다.
붓다라는 표현은 이를 잘 나타내 준다. 붓다는 번역하면 각자(覺者), 즉 '깨달은 사람'이라는 의미다. 즉 특정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인 것이다. 이 붓다의 범주 안에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미륵불과 같은 개별적인 붓다들이 존재한다. 마치 왕조 국가의 최고 수장에 대한 호칭이 왕이며, 이 왕 안에 다시금 법흥왕, 진흥왕, 성덕왕 등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불교의 이상인격인 붓다는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을 나타내는 보편적인 명칭이라는 말이다.
불교의 목적은 단순히 붓다를 믿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발견하고 체득한 진리를 통해서 내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 데 있다. 유신론적 종교가 신이 될 수는 없는 것에 반해, 동양 종교에서의 목적은 모두가 성인이 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런 점에서 붓다는 불교도의 이상이지, 단순한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석가모니는 열반에 들기 3개월 전,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가르침을 설했다. 이는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는 말이다. 여기에 석가모니에 대한 의존이나 믿음의 강요는 일절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인식 주체로서 판단자인 나와 진리만이 의지처가 된다는 가르침일 뿐이다.
또 석가모니는 평소 제자들에게 4가지에 의지하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①진리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依法不依人). ②진실된 경전에 의지하고 허황된 경전에 의지하지 말라(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③본질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依義不依語). ④지혜에 의지하고 앎에 의지하지 말라(依智不依識)'이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 당신을 믿으라는 측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본질을 직시해서 깨어 있는 삶을 살라고 촉구하고 있을 뿐이다.
석가모니는 제 아무리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이라도,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비판적 사유를 통해서 검토하고 수용할 것을 촉구한다. 즉 불교의 본질은 나를 세워서 붓다가 되는 것에 있지, 붓다만을 믿고 숭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