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수사의 첨병, 프로파일러의 세계]
<9> 현직 프로파일러들이 말하는 오해와 진실
편집자주
범죄 드라마나 영화에서 '초능력자'처럼 등장해 범죄자의 감정선을 무너뜨리는 프로파일러. 그러나 실제 프로파일러는 끊임없이 범죄자 심리나 행동패턴을 분석해 범행의 이유를 찾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월요일마다 범죄 현장 뒤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프로파일러의 세계를 조명합니다.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혀 2007년 사형을 확정받은 연쇄살인범 정남규. 경찰이 정남규의 집을 압수수색했을 때, 그의 책장에는 프로파일러의 인터뷰 기사와 사진이 스크랩돼 있었다. "담배는 끊어도 살인은 못 끊겠다"고 할 정도로 극악했던 정남규에게도 프로파일러는 연구하고 탐구해야 할 대상이었던 셈이다. 정남규뿐 아니라 요즘도 치밀한 완전범죄를 노리는 범죄자들은 프로파일러들이 등장하는 기사나 책을 읽으며, 프로파일러의 접근법이나 이들의 날카로운 분석을 피해갈 수법을 찾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프로파일러는 일반 국민뿐 아니라 범죄자에게도 상당한 관심의 대상이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프로파일러가 '해결사'와 같은 초월적 능력을 갖춘 이들로 묘사되면서, 이들의 역할과 위상을 둘러싼 오해도 적지 않다.
정말 그럴까. 한국일보가 '프로파일러의 세계'를 연재하며 만난 프로파일러들은 "우리는 점성술사도, 해결사도 아니고, 수사 지원을 하는 사람들"이라며 스스로를 정의했다. 프로파일러의 구체적인 역할과 실제 활동 사례를 듣기 위해 지난달 25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경찰청 소속 프로파일러 백승경 경위, 임흠규 경사, 한상아 경사를 만났다.
동기 불분명 살인 나오면서 필요성 대두
경찰청을 포함한 전국 경찰관서에는 총 37명의 프로파일러들이 분산 근무 중이다. 이날 만난 3명의 프로파일러는 경찰청에서 지방청 사건을 지원하고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범죄를 분석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국내에 프로파일링 기법이 도입된 건 2000년대 초반이다. 1990년 이전까지만 해도 살인의 이유는 원한, 치정, 돈 문제 정도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지존파와 막가파 같이 기존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조직이 등장했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며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 무고한 피해자를 노리는 연쇄 살인범이 잇달아 등장했다. 2006년 프로파일러가 된 백 경위는 "일을 시작할 당시는 기존 수사 관념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상 범죄'가 증가했던 시기"라며 "해외 프로파일링 기법 등을 공부하던 경찰관 사이에서 이를 국내에 적용해보자는 의견이 나왔고, 권일용 전 경정 등이 시도하면서 본격 도입됐다"고 설명했다.
프로파일링 주 목적은 범행 동기를 밝히는 것이지만, 거기서 그치지만은 않는다. 사건 현장과 기록을 분석해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정보들이라면 모두 수사팀과 공유한다. 모든 사건에 프로파일러가 투입되지는 않고, 수사 현장의 요청이 있거나 혹은 스스로 분석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건이 있을 때 자발적으로 합류한다. 한 경사는 "최근엔 묻지마 살인이나 피의자가 분노·충돌조절장애가 있을 때 주로 지원 요청이 온다"며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사건이나 일반적 상식에서 벗어나는 사건도 다수 담당한다"고 말했다.
프로파일러를 둘러싼 다섯가지 질문
프로파일러를 둘러싼 세상의 편견에 대해, 세 명의 프로파일러는 솔직하게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한계를 말했다.
①사건 기록만 보고도 범인을 특정한다?
백 경위=그럴 수는 없다. 사건 기록도 사람이 작성하는 것이라 작성자의 견해와 해석이 녹아들 수밖에 없다. 프로파일러가 직접 현장에 가는 것은 당연하고, 수사관과 검시관, 현장 감식요원 등 모두와 의견을 공유한다. 아무리 자세한 현장 사진이 남아있다 해도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는 구체적 분석이 불가하다. 직접 관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사건 현장에는 꼭 가보려고 한다.
실제로 2013년 '인천모자사건' 당시 투입된 이진숙 인천경찰청 경위(본보 7월 28일자 인터뷰)는, 어머니와 동생을 살해한 피의자 정모씨의 아내와 유대감을 키우기 위해 한 집에서 같이 잠을 잔 적도 있다고 한다. 프로파일러를 꿈 꿔 사건 초기부터 라포(신뢰감) 형성이 잘 됐던 피의자 아내는, 이 경위와 함께 자고 일어난 아침 시신이 묻힌 장소로 안내했다.
②직관에만 의존해 과학적이지 않다?
임 경사=흔히 알고 있는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분야처럼 이론적으로 증명되는 과학 영역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프로파일링은 큰 범주에서 '사회과학'으로 봐야 한다. 프로파일링은 범죄학, 심리학 등 이론을 활용해 진행된다. 심리학은 사람이 두려움을 느낄 때, 거짓말을 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등을 통계학적으로 도출해 놓은 학문이고, 범죄학도 범행동기를 유사한 방식으로 이론화한 학문이기에 이들을 접목시킨 프로파일링이 과학과 동떨어져 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백 경위=직관이 필요한 것은 맞다. 피의자의 범죄 동기 파악 자체가 관찰력을 기반으로 하니까. 때로는 피의자 심리와 일치가 돼 그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야 하기에 공감능력도 중요하다. 그렇다고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내용들을 프로파일링 보고서에 담거나 프로파일러 개인의 감상평을 수사관들에게 전달하지는 않는다.
③사이코패스나 연쇄살인범만 면담한다?
한 경사=아니다. 사이코패스나 연쇄살인범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가담한 범죄만을 다룰 수는 없다. 물론 살인, 강도 피의자 등 강력범죄자들을 많이 면담하는 것은 맞지만, 어떤 때는 강력범죄가 아니더라도 사건을 의뢰하는 경우가 있다. 용의자나 피의자의 진술 신빙성이 의심된다거나, 자살 사건인데 타살을 의심해볼 구석이 있는 사건 말이다. 몇 번을 만나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고, '해결될 때까지' 만난다.
임 경사=최근에는 사람을 면담해 사건을 분석하는 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 프로파일링에도 힘쓴다. 예를 들어 연쇄 범죄가 있다고 하면, 그 범죄의 발생 위치나 공간적 특성을 분석해 용의자가 있는 곳이나 다음 범행이 예상되는 곳을 예측하는 것이다. 거리 함수, 공간 통계 등이 사용된다. 국내에선 '지오프로스'라는 기능이 많이 확대돼 경찰청과 각 지방청뿐만 아니라 일선 형사, 수사관들도 활용하고 있다.
④미제 없이 100% 성공시킨다?
백 경위=기대가 큰 것은 알지만 그렇지는 않다. 가끔 현장에서도 범인을 특정해 달라는 요청이 온다. 범인의 연령대나 동기, 범죄를 저지를 만한 유형이나 유리한 탐문 방법을 조언할 수는 있지만, '저 사람이 범인'이라고 지목할 수는 없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미제 사건을 담당할 때도 있는데, 자료가 충분치 않은 경우 프로파일러들 역시 사건 해결이 쉽지만은 않다.
⑤자문에 불과할 뿐 법적 효력이 없다?
한 경사=아니다. '프로파일링 보고서'라는 명칭으로 법정에서 증거 목록에 포함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물론 법원이 보고서 하나를 단독 증거로 두고 양형을 하지는 않지만, 재판부가 심증을 형성할 때 많이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듣기로는 검사 중에서도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먼저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 경사의 설명대로 최근 재판 과정에서 프로파일링 보고서가 증거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2018년 '함께 죽자'고 여성을 유인해 강제추행하고 자살을 방조한 정모(44)씨 사건(본보 10월 12일자 13면), 2017년 경기 양평군 전원주택 살인사건, 장기 미제로 남았다가 풀렸던 2002년 아산 갱티고개 사건 등의 프로파일링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프로파일러가 되고 싶으세요?
프로파일러는 주로 특채 시험을 통해 선발하지만, 경찰공무원 자격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간 채용된 프로파일러들은 심리학·사회학·범죄학 석사 학위 소지자 또는 학사 학위 이상 소지자이면서 관련 분야에 2년 이상 근무(연구)한 경력자들이다. 물론 일반 경찰관 중 프로파일러가 된 경우도 소수지만 있다. 일반직 공무원의 자격 요건에 연령 제한이 없는 것과 달리, 경찰공무원은 20세 이상, 40세 이하여야 한다. 2005년 첫 특채 시작된 이후 60여명이 뽑혔다.
백 경위, 임 경사, 한 경사는 이런 자격 요건들 외에도 프로파일러에 적합한 인물로 '흡수력이 좋은 사람'을 꼽았다. 앞서 언급했듯 수사관과 검시관, 과학수사요원 등과 수시로 협업해야 하는 일이이서, 자기 주관이 너무 뚜렷하기보다 협력과 토론에 능해야 한다고 한다. 한 경사는 "사건은 전적으로 사실에 근거해 분석해야 하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방식에만 매몰되다 보면 그른 결과를 내기 마련"이라며 "스스로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는, 개방되고 흡수력이 좋은 사람이 프로파일러로서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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