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걸리고 싶어 걸린 것도 아닌데..."
추모도 위로도 빼앗긴 유족들 설움 커
남편은 새까만,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미라 같았다. 임종을 지켜보라는 호출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남편은 이미 예전의 남편이 아니었다. 다가갈 수도 없었다. 유리창 밖에서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을 뿐.
'확진 사망자'라는 꼬리표는 그 뒤로도 이어졌다. 코로나19 환자는 원칙적으로 선화장 후장례 절차를 따르는데 화장부터가 쉽지 않았다. 인근 화장장은 확진자의 화장을 꺼려해 수소문 하다 사망 이튿날 밤에야 멀리 근교로 나가 겨우 화장을 할 수 있었다. 한 줌 재로 돌아온 남편은 '확진자'였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이 마뜩잖아해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다. 생전 고향 선산에 묻히길 그토록 원했던 탓에 '이거라도 해주자' 생각했지만 시댁 식구들의 거부로 이마저 들어주지 못했다. 남편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남편을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건가'라는 질문은 A씨 가슴에 여전히 묵직한 숙제로 남아 있다.
A씨 이야기는 코로나19 발생 초기였던 지난 2월 25일 밤 12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날 그 시간, 하얀 방역복으로 중무장한 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남편이 코로나19 확진판정을 받은 지 12시간 만이었다. 남편은 신장이 좋지 못했던 기저질환자. 자가격리 기간 동안 이틀에 한 번씩 받던 투석치료를 못 받으면서 온몸이 붓고 내리 설사를 하며 코피까지 쏟았다. 투석까지 할 수 있는 코로나19 병상을 찾는 게 일이었다. 보건소 등에 수십 통의 전화를 돌려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 자리가 있다는 얘길 들었다. 하얀 방역복을 입은 이들은 남편을 병원으로 옮겼다.
처음엔 길어야 일주일이라 생각했다. 그저 건강히 다시 만나자는 말을 눈빛으로만 주고받았다. A씨도 남편 입원 첫날 확진판정을 받았다.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 병원으로 이송됐다. 입원 3일째 되는 날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편은 "치료 잘 받으라"더니 "지금 이 통화가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말만 남겼다. A씨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이후에 오는 연락마저 '임종이 가깝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 같은 암울한 내용들뿐이었다. A씨는 "나도 온전치 않은데 그런 얘기까지 들으니 감당이 되지 않았다"며 "남편을 그렇게 격리된 곳에서 홀로 보내야 되나 싶어 눈물이 났다"고 울먹였다.
한 달 뒤 먼저 퇴원한 A씨는 곧바로 서울의 병원으로 갔다. 그제야 마주한 남편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남편은 새까만 연탄 같았다. 약물을 넣는 관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고, 그 관이 입에 3~4개씩 한꺼번에 물려 있다 보니 입 주변이 모두 헐어 있었다. 독한 약을 써서일까, 손발은 썩은 듯 진물이 흥건했다. 그렇게 45일 만에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A씨는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장면을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A씨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남편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 때문이다. A씨뿐만이 아니다. 딸도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호소하며 직장을 그만뒀다. A씨는 기댈 곳이 없다. 이웃의 눈총도 눈총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이사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코로나19에 걸리고 싶어 걸린 것도 아닌데, 왜 우리는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남편의 죽음은 위로받지 못하는 걸까요. 아직도 가슴이 아파요."
아버지에게 코로나19를 옮긴 박철규(46)씨는 자신의 실명을, 그리고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 신도임을 밝혀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확진 사망자라는 이유로, 자신이 신천지 교도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죽음을 추모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서다.
박씨는 대구 신천지에서 확진자가 쏟아지던 지난 2월 확진자가 참가한 신천지 예배에 참석했다 밀접접촉자로 분류됐다. 자가격리 이전까지 박씨는 10분 거리에 살던 아버지를 열심히 돌보던 참이었다. 지금도 가슴 아픈 대목 중 하나는 그때만 해도 코로나19 증상이 뭔지 잘 몰라 열과 기침이 난다는 아버지에게 "몸살감기 같으니 해열제 같은 걸 드시라"고 했던 일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는 "기침을 했더니 피가 난다"고 했고, 보건소를 통해 곧바로 음압병실로 이송됐다. 혈액암을 앓고 있던 아버지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됐다. 폐 기능이 뚝뚝 떨어지더니 끝내 집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자가격리 중이었던 박씨는 임종도, 장례도 아무것도 지켜보지 못했다. 박씨는 "부모를 봉양하는 자식이 부모를 지키지는 못할망정 죽게 했으니 죄인이 따로 없다"며 "어떤 말로도 이 슬픔을 표현할 수 없다"고 흐느꼈다.
하지만 박씨에겐 슬퍼할 시간도 허용되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친인척들의 원망에다 신천지 신도라는 비난까지 겹쳐서다.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건 아버지에게 남겨진 '확진 사망자'라는 주홍글씨다. 박씨는 "코로나19는 하나의 재앙이고 일부러 걸린 것도 아니다"며 "저야 죄인이라 하더라도, 아버지만큼은 그 죽음에 대해 온전한 추모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