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 수사 끝 전 대통령들 구속 이끌어
수혜 입은 현 정부와도 갈등 빚어
'표적수사' 논란에 끊이지 않는 '대망론'까지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기 때문에."
윤석열 당시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장, 2013년
"주인을 모시려고 정부에 들어간 게 아니다."
세르지우 모루 전 브라질 법무장관, 2020년
발언의 시차도 있고, 둘이 서 있는 장소는 지구 정 반대편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윤석열 검찰총장과 브라질의 세르지우 모루 전 법무장관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말을 했으며, 또 비슷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수사를 했고, 현 정부에서 중용됐지만 결국 입장 차로 인해 집권 세력과 갈등을 빚은 끝에, '잠재적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것까지 꼭 닮아 있습니다.
전 대통령들 줄줄이 감옥에 보내다
세르지우 모루는 2014년부터 브라질 파라나주 쿠리치바의 연방 판사로서 '라바 자투(세차작전)'라는 이름의 반부패 수사를 지휘했습니다. 이는 모루가 우리나라에서 검찰의 역할을 일부분 분담하는 브라질의 '수사판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부패로 얼룩진 브라질 정가에 대한 수사는 그 동안 시간이 오래 걸리고 지리멸렬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모루는 속전속결로 수사와 기소, 재판을 진행해 국민들의 찬사를 얻었습니다.
'라바 자투' 수사팀은 해외에서도 유명한 브라질 건설사 오데브레시 등이 국영 석유업체 페트로브라스에 대형 계약 수주의 대가로 뇌물을 줬고, 결과적으로 브라질 정치권으로 흘러든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좌파 노동자당(PT)의 유력주자인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은 징역형을 선고 받았고, 지우마 호세프 당시 대통령은 2016년 탄핵됐습니다. 우파 브라질민주운동당(PMDB)을 이끌며 호세프 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한 미셰우 테메르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로 비리에 연루돼 2019년 퇴임 후 수감됐습니다. 이렇게 국민 영웅, '슈퍼 모루(SuperMoro)'가 탄생했습니다.
이는 윤석열 현 검찰총장의 과거 정권에 대한 수사가 결국 전 대통령들의 구속으로 이어진 것과 닮아 있습니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하게 된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수사팀장으로 합류해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과 국정농단 연루자 사법 처리에 앞장섰습니다.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장으로 발탁됐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 부회장 등을 수사해 구속으로 이어졌습니다. 모루가 브라질의 국민영웅이 된 것처럼, 국민들이 당시 윤석열 지검장의 '호쾌한 수사'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정치적 수사' 논란도 지속
물론 모루의 수사가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정치적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았습니다. 2016년 당시 모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룰라를 감옥에 집어넣을 심산이었습니다. 그는 호세프 당시 대통령이 룰라에게 면책 특권을 부여하기 위해 룰라를 장관으로 임명하려는 논의를 한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고, 이는 룰라의 수감과 호세프의 탄핵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2019년 좌파 성향의 독립언론 '인터셉트'는 2016년 당시 모루와 연방검사들이 나눈 대화 내용을 폭로했고, 이를 근거로 모루가 룰라를 표적 수사를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모루는 2020년 주간지 타임과 인터뷰에서 "나의 수사를 정치적 박해로 취급하려는 시도가 있다"며 "룰라에 대한 나쁜 감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수사에 대한 갖가지 뒷말이 끊이지 않는데, 이는 '라바 자투'로 촉발된 브라질 정계 개편의 최대 수혜자가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총장 역시 검찰총장을 맡게 된 2019년까지만 해도 야권으로부터 '코드 인사' '코드 수사'라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대표적으로 2018년 이재수 전 기무사 사령관의 세월호 사찰 의혹을 수사하던 도중 이 전 사령관이 투신자살했을 때 '검찰의 몰아가기 수사'가 원인이란 지적이 나왔습니다. 현재는 거꾸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수사 때문에 여당 의원들이 비슷한 지적을 하고
'살아있는 권력'과 또 갈등
모루가 의도했든 아니든, '라바 자투'의 최대 수혜자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브라질 대통령입니다. 룰라와 호세프, 테메르 등 기성 정치권의 유력 주자들이 부패 수사에 연루되면서 2018년 대선에서 낙승했습니다. 그는 "정치에 관여하기 싫다"던 모루를 법무장관 자리에 어렵사리 불러들이면서, 조직 범죄와 부패 척결에 기대감을 더했습니다.
하지만 모루는 임기 2년 만인 올해 4월,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하며 사임했습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으로부터 다짐을 받았던 "부패 척결과 법치에 대한 의지"가 사라졌다고 정부를 직격했습니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수사를 보우소나루 정부가 방해했다는 게 모루의 불만이었습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의 두 아들의 부패 혐의에 대한 수사가 이뤄질 시점에,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법무부를 거치지 않고 마우리시우 발레이슈 연방경찰청장을 해임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발레이슈 전 청장은 모루가 연방판사이던 시절 '라바 자투'를 함께한 '모루 사단'이라 할 만합니다.
윤석열 총장 역시 검찰총장으로 깜짝 발탁된 직후 '살아있는 권력'을 겨냥한 수사가 도화선이 돼 정부·여당과 갈등 관계가 됐습니다. 윤 총장이 지휘한 검찰은 지난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 가족을 입시비리와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집중 수사해 기소했고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올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이른바 '윤석열 사단'으로 알려진 검사들을 인사 조치 했고, 결국 윤 총장을 징계하는 절차를 진행 중이죠. 다만 윤 총장은 모루와는 반대로 잘못한 것이 없다며 자리를 지키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치에 본격 뛰어드나
윤석열 총장은 지난해부터 자신을 대선주자 여론조사에 넣지 말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모루도 정치에 뜻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 했구요. 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그렇지 않습니다.
윤 총장이 뚜렷한 후보가 없는 보수 야권의 대권 주자로 지목되고 있는 것처럼, 모루 역시 '포퓰리스트'인 보우소나루 대통령과 좌파 진영의 룰라 전 대통령에 밀려 이렇다 할 대표 인물이 없는 브라질 중도 보수 진영의 잠재적 구심점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일단 모루는 최근 엉뚱하게도 국제 컨설팅 기업인 '알바레즈 앤드 마살'에 취업했습니다. 모루의 가족이 반부패 수사를 진행하면서 온갖 외압에 시달린 그의 정계 진출을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모루의 부인 호잔젤라 모루는 최근 브라질 언론 '에스타두 지 미나스'와 인터뷰에서 남편의 정치권 진출 가능성을 두고 "1년, 2년, 10년 뒤를 벌써부터 얘기할 것은 아니다"라고 여지를 남겼는데요.
윤 총장은 10월 22일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퇴임 후 국민에게 봉사하겠다"고 발언하며 '윤석열 대망론'에 불을 지폈습니다. 모루 역시 2022년 대선에 출마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침묵하고 있는데,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는 이미 사인(私人)이 된 모루가 기존 중도 보수 성향 정당에 참여하거나 독자 세력을 구축할 수 있다는 예측이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현직인 윤석열 검찰총장과, 법무장관까지 했으나 결국 자리를 내려놓은 세르지우 모루는 스스로 '결코 정치적이지 않다'고 하고 있지만, 이미 각 나라 정치권의 중요 인물에 서 있습니다.
윤 총장은 당장 10일 열리는 법무부 징계위원회에서 해임될 수도 있는, 운명의 갈림길을 앞에 뒀습니다. 어쩌면 윤 총장도 모루 전 장관의 사례처럼 '대망론'의 덩치를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여론의 기대가 정말로 이들을 정치라는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끌어들이게 될 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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