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처법 저지 결기 사라지고
맥빠진 '나홀로' 필리버스터
김기현이 첫 주자이자 마지막
9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 손을 들고 나선 국민의힘 의원은 4선인 김기현 의원 단 한 명 뿐이었다. "거대 여당 입법 독주에 국민 여러분이 함께 분노해달라”고 호소하고, 초선 의원들이 '의원직 총사퇴'까지 불사하겠다고 벼른 '결기'는 며칠 만에 시들었다.
정기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린 이날은 '국민의힘의 날'이어야 했다. 필리버스터는 소수 정치세력의 무대다. 다수당의 법안 강행 처리를 막아 세우고 '법안이 왜 처리되면 안 되는지'를 조목조목 설파하는 자리다. 법안 표결 결과는 다수결 원칙이 지배하더라도, 민주 토론 과정에서 소수 세력의 반대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국회법이 보장하는 장치다.
이날 필리버스터는 ‘살아 있는 권력 감시’라는 공수처 취지가 얼마나 훼손됐는지를 국민에 알릴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국민의힘은 그러나 종일 어수선하기만 했다. 화력을 점검하고 전략을 짜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본회의에 앞서 의원총회를 연 국민의힘은 △공수처법 개정안 △국가정보원법 개정안 △대북전단살포 처벌 규정을 담은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 개정안 △사회적참사진실규명법 개정안 등 5개 쟁점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남은 건 '누가 필리버스터 주자로 나설 것이냐'였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의 야당 대표 구속 시도를 막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원고도 없이 이어간 5시간 19분의 필리버스터는 구속 동의안을 무산시켰고 끝내 역사로 남았다. 누가, 어떤 메시지를 발신하느냐에 따라 문재인 정부에 깊은 상처를 남길 수도, 대형 정치인으로 단숨에 우뚝 설 수도 있었다.
경쟁률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정작 나선 건 김기현 의원 뿐이었다. 이날 오전 YTN라디오 인터뷰에서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공수처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같이 막무가내로 법 절차를 무시하고 권력에 대한 수사를 방해할 소위 '대깨문' '문빠' 법조인을 (공수처장으로) 데려올 것”이라며 필리버스터로 여당을 제지하겠다고 공언했으나, 반나절 만에 무색해졌다. 하지만 이날 밤 9시부터 필리버스터에 나선 김기현 의원만 헌법 1조를 인용해 "대한민국은 '문주공화국'(문재인+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 주권은 문님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문빠들로부터 나온다”면서 공수처법 개정안을 밀어붙이는 문재인 대통령과 여권을 3시간 동안 싸잡아 비판했다.
국민의힘에서 '야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19대 국회에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테러방지법 제정안 처리 저지를 위해 의원 38명이 9일에 걸쳐 192시간 동안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당시 민주당은 테러방지법 통과를 막지 못했지만, 박근혜 정부가 강행한 테러방지법의 위험성을 선명하게 알렸다.
국민의힘은 전략 부재도 노출했다. 필리버스터 대상 법안의 수를 놓고도 원내 대변인들의 말이 달라 혼선을 빚었다. '5개냐, 3개냐'를 놓고 우왕좌왕한 끝에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 개정안 △사회적참사진실규명법 개정안을 제외한 3개 법안에 대해서만 필리버스터를 하겠다고 결정했다. 혼선을 정리하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다.
이에 대해 최형두 원내대변인은 "실제 6명이 토론 신청을 했지만 김 의원 한명이 나섰다"며 "도중에 멈추면 여당이 방해 필리버스터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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