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생존한 무인도에 단 한권의 악보만 가져가야 한다면?” 음악가로 살다 보니 이런 유의 질문을 종종 접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주저 없이 바흐의 평균율이라 대답해 왔다. 단순히 좋아하는 음악이어서가 아니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고독하고 척박한 무인도의 표류 속에서 나를 지켜줄 음악은 진리의 샘물처럼 아무리 파고들어도 마르지 않을 바흐의 평균율만 한 것이 없었다. 베토벤 해석의 위대한 거장으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조차도 인류가 멸망할 시점에 가장 필요한 음악은 베토벤이 아니라 바흐라 여겼다. 모든 서양음악이 소멸한다 해도 바흐 평균율 한 권만 있으면 음악문명의 재건이 가능하다고 공언했으니 말이다.
피아니스트의 일용할 양식이라 할 이 악보집에서 바흐는 푸가(Fuga) 형식의 완성을 이뤄냈다. 여러 독립적인 성부를 결합해 하나의 음악을 엮어내는 다채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는데, 다성음악의 모든 것을 성취한 동시, 모든 가능성을 소진시킨 것이다. 이때 연주자는 각기 다른 입체적인 음색으로 여러 성부를 동시에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바흐의 다성음악은 그래서 품이 많이 들고 만만찮은 공력이 필요하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오른손이 주선율을 이끌고 왼손이 펼친 화음으로 배경을 떠받치는 간결한 2분법이 아니다. 여러 성부를 동시에 연주해야 하니 양손은 복잡한 실타래처럼 뒤엉킨다. 뭉뚱그려 뭉개지지 않은 채 입체적 수평으로 개별 선율의 흐름을 풀어내려면 고도로 정제된 손끝 감각과 청각적 몰입이 필요하다.
이렇듯 층층이 쌓여 수평으로 흐르는 바흐의 다성음악 중에서도 인간의 귀가 가장 현혹되는 성부는 아무래도 하늘을 활공하는 소프라노와 땅 속에 뿌리내린 베이스라 하겠다. 이 둘은 물리적 거리가 뚜렷해서 높은 음역은 오른손에, 낮은 음역은 왼손에 그 역할을 쉽사리 분담시킬 수 있다. 그런데 푸가 연주의 성패는 오른손과 왼손이 쉴 새 없이 주고받으며 연주해야 할 중간 성부에 있다. 알토와 테너 중간성부는 하늘의 소프라노와 땅 밑의 베이스를 아우르고 엮어내면서 선율의 교차를 세밀하게 직조한다. 소리의 직물은 중간성부의 중재 없이는 파탄에 이르고 만다. 각각의 성부가 조화롭게 공명하기 위해서는 상대방 주제선율에 부단히 조응하면서 자신을 조절해야 한다. 이처럼 중간성부의 조율, 상대방에 대한 부단한 조응, 스스로를 성찰하는 자기 조절은 바흐 평균율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진리이자 미덕이다.
누군가 나에게 무인도에 들고 갈 음악을 다시 질문해 온다면 여전히 바흐의 평균율이라 대답하되, 무인도의 고립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함께 들어야할 음악이라 목청 높여 주장하고 싶다. 내 편과 네 편으로 분열된 양극화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충돌에 대한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고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46.1%. 그 찬반의 비율이 소수점 첫 자리까지 똑같았다. 중간성부의 교집합을 공유하지 못하니 갈등을 해결하고 합의를 도출하기가 점점 어려워지지 않던가. 게다가 온갖 정파적 미디어는 상대방의 선율엔 아예 귀를 닫아 버리고 내 성부의 의견만 계속 반복해 듣길 부추긴다.
‘너는 너의 말을 하고, 나는 나의 말을 한다.’ 어떻게 하면 이 동떨어진 괴리를 줄이고 중간성부의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서로 설득이 가능한 세상을 구현할 수 있을까. 2020년 12월, 자기편 목소리만 반복해 강화하고 다른 편 목소리는 물리쳐 혐오하는 우리 사회에 음악가 한 사람으로서 미력하나마 제안하고 싶다. 중간성부의 조율과 상대방에 대한 부단한 조응과 스스로를 성찰하는 자기 조절의 미덕이 살아 있는 바흐의 음악을 기억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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