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벤처·패션의 메카? 그 시절 누나들의 애환 담고 있는 가산·구로동

입력
2020.12.11 04:30
수정
2020.12.11 12:56
15면
0 0

<31> 구로공단 '누나'의 애환 담긴 가산·구로동

지하철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에 있는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 서울미래유산 제공

지하철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에 있는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 서울미래유산 제공


가난하고 헐벗었던 시절 ‘한강의 기적’을 이끈 한국수출국가산업단지(구로공단)가 있었던 서울 가산동과 구로동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핫 플레이스’다. 2000년대 초반부터 들어선 고층빌딩에 입주한 각종 벤처ㆍIT기업에서 이들은 또 다른 기적을 꿈꾸고, ‘마리오아웃렛’ ‘W몰’ 대형 쇼핑몰로 몰려들었다. 한때 침체됐던 지역에도 활기가 돌았다.

벤처ㆍ패션 메카로 자리잡으며 구로공단의 흔적은 사라져 갔지만, 골목길로 한 발짝 더 들어가보면 격동의 60~80년대 소시민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오로지 '잘 먹고 잘 살고 싶다'는 신념 하나로 청춘을 바쳐 우리 경제를 일으켜 세운 언니ㆍ누나들의 애환이 서려있다. 금천구와 구로구는 2013년부터 도시재생과 관광사업의 일환으로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을 지닌 장소를 찾아 도보 관광코스로 개발해 확대해 나가고 있다. 서울시도 구로공단과 주요 건물을 미래유산으로 등록해 급속한 사회 변화로 훼손ㆍ멸실 가능성이 있는 유산을 되살리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 곳은 중장년에게는 추억과 희망의 공간으로, 젊은 세대와 학생들에게 부모 세대를 가슴으로 이해하는 공간이 된다.

지하철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에 있는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 서울미래유산 제공

지하철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에 있는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 서울미래유산 제공


10명이 칼잠 자던 벌집 곳곳에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이다. 지하철 1ㆍ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 1번 출구로 나와 길 건너편 고층 빌딩 옆 골목에 자리한 이 곳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여성노동자들의 거주시설 이른바 ‘벌집’을 재현했다. 벌집은 ㄷ자, ㄱ자 모양의 건물에 방 한 칸과 조그만 부엌으로 구성된 쪽방이 20~50개가 있는 다세대 주택을 일컫는다. 수많은 작은 방들이 모여 하나의 주거 단위를 형성해 ‘벌통집’, ‘닭장집’, ‘토끼장’, ‘비둘기장’이라고도 불렸다. 체험관은 85년 준공된 '벌집'을 개량해 꾸몄다. 방은 보통 7㎡ 정도로 매우 비좁았지만, 월세가 부담스러워 4~10명이 함께 살았다. 서울역사편찬원이 최근 펴낸 ‘서울 동(洞)의 역사(구로-금천구편)’에 따르면 방세는 월 5만원이었는데, 입사 3년차 숙련공의 월급이 5만9,000원(48시간 잔업ㆍ2일 철야 포함)이었다.

금천구 관계자는 “여러 명이 비좁은 방에서 간신히 한쪽 어깨만 붙이고, 다리도 못 뻗지 못한 채 지친 몸을 위로하던 공간”이라며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해서, 아침마다 수십 분에서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체험관을 둘러본 2030세대나 학생들은 신기해하거나 놀라고, 5060세대는 당시 기억이 떠올라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벌집을 체험하고 나서야 밖에서도 주변에 벌집처럼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적색 벽돌로 지은 2층짜리 허름한 주택에 출입문이 일정 간격으로 나란히 보이거나 계량기ㆍ우편함이 10여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영락없는 벌집이다. 벌집을 건축사무소나 식당으로 개량하기도 했다.

20여년 전부터 슈퍼를 운영해오고 있는 한 주민은 “건물 주인들도 나이 들어 변변한 소득 없이 월세로 생활하니까 건물이 크게 바뀌지 않은 곳이 꽤 많다”며 “이런 곳들은 한국인도 살지만, 현재는 대부분 중국 교포 노동자들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바비인형을 생산해 수출했던 공장 '대협'을 소개하는 안내판. 구로구청 제공

바비인형을 생산해 수출했던 공장 '대협'을 소개하는 안내판. 구로구청 제공


쇼핑몰에 가려졌던 ‘구로동맹파업’ 빛 보다

가산동을 가로지르는 중심도로인 디지털로 주변 거리에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쇼핑몰이 몰려 있는 마리오사거리와 디지털단지오거리 일대는 85년 구로동맹파업이 벌어졌던 곳이다. 당시 노조활동이 활발해지자 정부가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 3명을 구속했고, 이에 반발한 구로지역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일으켜 연대 투쟁했다. 매일 밤 늦게까지 가산디지털단지를 가장 환하게 밝히는 쇼핑몰의 화려한 조명에 가려졌던 여공들의 당찬 행동은 이를 알리는 표지석이 최근 세워지면서 빛을 발하게 됐다. 거리에서 만난 서경희(29)씨는 “쇼핑하러 자주 오지만, 구로동맹파업은 오늘 표지석을 보고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신상아 서울여성노동자회 사무국장은 “구로동맹파업은 정치적인 문제로 처음 연대해 노동탄압 중단과 노동부 장관 퇴진을 외쳤던 파업”이라며 “이 같은 상징성을 감안해 지난해 금천구에 제안해서 올해 10월 표지석이 마련됐다”고 말했다.

마리오사거리에서 디지털단지오거리(옛 가리봉오거리) 방향으로 쭉 걷다 보면 바비인형 옷을 생산했던 업체(대협)가 있었던 곳을 안내하는 표지석도 마주하게 된다. 당시 바비인형으로 유명한 미국 바텔사의 하청을 받아 수출했던 대협에서는 '국민학교'를 갓 졸업한 13, 14세의 앳된 여성들도 일을 했다. 이들이 여린 손으로, 한때 선망했던 바비인형 옷을 수작업으로 만들어 수출했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가리봉고개에 있는 안내판. 구로구청 제공

가리봉고개에 있는 안내판. 구로구청 제공


담벼락에서 들리는 목소리

디지털로를 사이에 두고 대협의 맞은 편 쪽에 있는 가리봉고개로 가면, 빨간 벽돌의 담벼락에 금속재질의 대형 안내판이 나온다. 여기는 벌집이 밀집해 있어 항상 사람들도 북적였던, 지금의 명동ㆍ강남과 같은 곳이다. 친구들과 밥도 먹고, 옷ㆍ화장품을 사 멋도 부렸던 가리봉시장도 저 아래로 보인다. 구로구는 이들의 주 무대였던 이곳에 60년대 구로공단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변천과 이 곳에서의 삶과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주요 사진과 기록을 담았다. ‘닭장 집’, ‘18세 이상의 용모 단정한 여성’이라 쓰인 당시 구인광고 등을 사진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노동자들의 발언도 볼 수 있었는데, 그 중 유독 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식권을 하나 주는 날은 잔업이고, 두 개 주는 날은 철야거든요. 잔업은 저녁을 먹고 열시까지 일하는 거고, 철야는 자정에 야식 먹고 새벽 두세시까지 일을 하는 거죠.”

(윤혜련, 삼경복장/가리봉전자)

누구나 당시 여공들이 하루하루를 얼마나 고되고 힘겹게 버텨냈는지 단박에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연락이 닿은 윤혜련(59)씨는 2남3녀 중 둘째로, 언니가 중학교에 다녀서 자신은 학업 대신 코트 등을 생산하는 ‘삼경복장’에 취업했다고 한다. 그는 “근로계약서나 인권은 전혀 모른 채 회사가 시키는 대로 일하면서 동생들이 잘 자라 줘 보람을 느끼고,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고 자부한다”며 “추후에 사회의 불합리에 눈 떠 노동운동에도 헌신해 사회도 바꿨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가산ㆍ구로디지털단지 옆에 있는 안양천을 따라 산책하고 있다. 금천구청 제공

시민들이 가산ㆍ구로디지털단지 옆에 있는 안양천을 따라 산책하고 있다. 금천구청 제공


'악취' 안양천은 시민 휴식처로

로데오사거리에서 마리오아울렛과 W몰 사이에 있는 도로(디지털로)는 ‘수출의다리’와 연결된다. 서울미래유산으로 등록된 ‘수출의 다리’는 가산디지털 2단지와 3단지(옛 구로공단 2단지와 3단지)를 구분하는 경계인 경부선 철길 위에 1970년 놓여 두 단지를 잇는 고가차로다. 이 고가차로를 통해 수출돼 ‘수출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경부선 철도 위로 물류수송이 가능해지면서 철도 횡단으로 인한 신호대기가 불필요해지고 철도 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됐다.

수출의 다리를 건너 길을 따라 쭉 걸으면 직장인과 주민들의 휴식처인 안양천으로 이어진다. 8일 찾은 안양천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집콕’에 지쳐, 산책이나 조깅, 자전거를 타며 답답함을 떨쳐 버리기 위해 나온 시민들이 눈에 띄었다.

걷고

송정근 기자

송정근 기자

안양천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주변 논밭에 물을 공급해주던 역할을 하다, 그 이후 주변의 농토와 택지가 공장지대로 탈바꿈하면서 그 역할이 공업지대와 주택가의 하수로로 크게 바뀌었다. 이 때문에 각종 오ㆍ폐수가 흘러 들어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악취가 진동할 정도로 수질 오염이 심했지만,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꾸준한 환경 정화와 수질 개선 등의 노력으로 되살아 났다.

덕분에 지금의 안양천은 주민들에게 사랑 받는 휴식처로 자리잡았다. 안양천을 따라 벚꽃나무 등을 심어 놓고, 산책로와 자전거도로도 깔끔하게 조성됐다. 축구장 인라인스케이트장 등 체육시설도 곳곳에 있다.

매주 한두 차례 안양천에서 산책한다는 윤옥순(70)씨는 “물 썩는 냄새가 심해 사람들이 접근도 하지 않으니까 97, 98년쯤 안양천 살리기 운동까지 했다”며 “그 이후 물이 맑아져 하천 생태계가 살아나고, 지금은 매년 봄 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굳이 여의도 윤중로까지 갈 필요도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고 말했다.

구로구와 금천구는 구로동과 가산동에서 숨어있는 이야기를 아직도 찾고 있다. 내년에는 구로공단의 발자취를 실증적으로 보여줄 ‘산업박물관’ 개관도 앞두고 있어 사료나 유물도 수집 중이다. 구 관계자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단으로 구로공단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며 “박물관이나 다름 없는 구로공단과 관련된 컨텐츠를 지속 발굴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민식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