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독창적 문체로 남성 패션지 ‘GQ’를 18년간 이끌어온 이충걸 전 GQ 편집장이 문화 현상의 이면을 새롭게 들춰 봅니다. 현재 서울 필동에 사는 이 전 편집장의 ‘멘션(mentionㆍ촌평)’은 격주 수요일자 <한국일보> 에 실립니다 한국일보>
<18>와인을 즐기는 방법
누구를 만나 술 마시기 불여의해진 지금, 지난 생일에 친구들이 와인 선물을 많이 해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처음엔 와인 병을 좌르륵 볼링 핀처럼 세워두었는데 와인 박스까지 늘어나니 와인 판매점을 차려도 괜찮을 위용을 갖추었다.
술을 마시면 늘 배우지도 않은 노래를 했다. 술이 없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기쁘면 기뻐서 마시고, 슬프면 슬퍼서 마시고. 라임까지 너울거리는 타령 한 사발에는 술로 불살랐는지 탕진한 건지 모르는 애매한 세월이 웅크리고 있었다.
주변엔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다. 취하지 않은 것과 명료함은 비슷한 말. 나의 무감각한 수치심은 술이 없어 연속적인 현재를 사는 친구들을 동정한다. 겉으로는 술 없이 위대한 작품도 없었다고 강변하고 싶지만 속으로는 취하지 못 하는 것이 그들 인생을 구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현대의 술고래가 술에 대해 적는 마음은 21세기 음주에 대한 편람 같은 걸까.
나는 혼자 마시는 걸 좋아한다. 그게 무슨 재미냐, 외로워 보인다, 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술 마실 때만큼은 내 자신에게 얼마나 다정해지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또 같이 마시던 상대가 수틀릴 때처럼 외로운 순간이 어디 있다고. 해가 질 때, TV의 왁자한 고함 소리를 끄고, 늘 함께 보내야 한다는 가족의 제단에 굴복하지 않고, 마셔도 같이 마시자는 우정의 압박감을 딛고 혼자 마시면 방금 고해를 마친 듯 청결한 기분이 든다.
12월 첫날, 와인을 마시고 싶은 마음은 날씨처럼 숨길 수 없었다. 가벼움의 정중한 용어, 시큼한 샤도네이를 절반 따르고 빛깔과 투명함을 느껴보다가 글라스를 기울여 소용돌이치게 흔들며 깊은 향을 긁어냈다. 방금 입에 머금은 와인을 설명하는 순간은 피부에 가벼운 공기가 스칠 때의 즐거움을 닮았다. 입안에서 가만히 혀를 굴리며 나는 와인을 마시는 게 성층권 아래에서 얼마나 좋아하는 행위인지 새삼 절감했다. 맛있는 와인을 묘사하는 형용사는 백만개일지 모르지만, 최상급 형용사는 하나뿐이다. “이 와인 진짜 맛있다!”
한 잔 또 한 잔을 마셔도 취하는 건 마찬가지라는 사람들은 묻는다. 왜 와인 한 병에 몇 만원을 써? 내 생각에 와인은 소주보다 열배 좋다기보다 열배 더 흥미롭다. 햇볕 아래서 바늘보다 작은 무엇조차 숨기지 못하는 날, 갈증처럼 와인을 찾는다. 벼르던 책을 펼칠 때를 위해 남겨둔 와인은 특별한 기회의 순간과 같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눈을 떼지 않고 참선 중인 듯 무욕의 상태로 무릎 위에 와인을 올려놓는 건 세계에서 제일 오래되고 유명한 동시에 가장 바르게 평가되는 와인의 잊힌 덕목.
전에는 친구들하고 늘 우리 집에서 와인을 마셨다. 거개는 미리 나에게 전화를 했다.
“좋아하는 와인 있어? 나는 와인 잘 몰라서….”
이것은 한국식 와인 프로토콜. 친구들은 와인에 대해 아니 모르니, 자의식 강한 연기를 뿜어내며 부정적인 웜업을 한다. 더 많은 냄새 수용기를 콧속에 지닌 것도 아닌 채 나의 오감을 만족시키지 못할 무능을 미리 탓하며. 나는 친구들을 다독인다. “레이블을 봐.‘샤또’가 적혀 있는 상표에 포도 종류하고 빈티지, 제조사하고 배급사가 무조건 보일 거야. 못 찾겠다고? 하긴….” 나는 주춤한다. 우리가 수입 회사까지 알 의무는 없지. ‘보르도’의 숨은 의미가 “포도주 전문가가 아니라면 굳이 나설 것 없어”는 아닐 것이다. 나는 허세를 부리며 답한다. “와인 리스트로 고민할 필요 없어. 나는 세인트(Saint)한 와인이 좋아. 영어로는 성스러운, 한국 말로는 싼.”
포도 행성에선 따질 것이 많았다. 어떤 걸 마실까? 뺨은 긴장하는데 가슴에 붉은 꽃이 피는 레드 와인? 정서를 자극하고 표현하게 하는 화이트 와인? 와인 이해의 굳은 장벽을 쌓아올리는 올드 월드 와인? 보디빌더처럼 육중한 뉴 월드 와인? 이때 국가적 캐릭터가 등장한다. 욕망 가득한 의인화로 와인을 뼈대 굵은 여자에 빗대는 프랑스 와인? 과장된 활기가 넘실대는 미국 와인? 퀴퀴하면서도 절제된 남미 와인? 범위를 넓혀볼까? 풍요의 정점을 찍은 만큼 처참하기도 했던 부르고뉴? 주춤했다가 다시 피어오르는 나파 밸리? 여전히 위엄을 풍기는 보르도? 웬만해선 잘 모르는 오리건? 머스크향 물씬 나지만 무겁고 부담스러운 포트 와인? 갑각류에 특히 어울리는 식사 끄트머리용 아이스 와인? 조청이 손사래칠 정도로 달달한 디저트 와인? 포도 작황이 좋은 해에는 액체화 된 버블껌 맛이, 흉작인 해에는 화학적인 맛이 나는 보졸레 누보?
생물학자들은 사람을 세 개의 카테고리로 나눈다-감식가 아닌 사람, 중간 감식가, 그리고 수퍼 감식가. 취향이 없다는 것은 까다롭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친구들은 극한의 수확과 위험천만한 제조 과정, 완벽히 정밀한 상태에서만 완성되는 한정 생산 와인이 아니라 가게에서 권해준 가성비 와인을 고른다. ‘가성비’라는 말은 포도주 장인에겐 실례 같아도, 우리는 고상함을 가격으로 표현하는 부자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인정 같은 건 필요하지도 않은 걸. 희열 속에서 시간이 천천히 지나간 뒤에는 포도주 입방체의 구조나 아로마틱한 우아함보다 그냥 그것에 취할 뿐인 불명확한 엑스터시가 남을 뿐이다. 결국 내가 와인에 대해 원하는 건 우아함보단 기쁨. 소박한 럭셔리의 거창함.
와인은 확실히 성인의 의지와 매너, 취향을 감별하는 단계의 술이다. 소맥처럼 한국 어른들의 음주 기차에 탑승한 대가로 그 야비한 비루함에 모두가 버무려진 술도 아니고. 그래도 회고록 사이에 끼워주고 싶은 무용담은 꽤 있다. 언젠가 프랑스 프로방스 출장을 다녀온 날 밤, 집에서 와인을 따는데 코르크가 금속처럼 병 주둥이에 결박돼 있었다. 급기야 와인 병을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왼손으론 병 주둥이께를 단단히 쥔 채 무식하게 오프너를 뽑아 올리는데 갑자기 찌지직, 물웅덩이에 전기선을 던지는 소리가 났다. 코르크가 주둥이에 꽂힌 채 병이 그대로 찢어졌다! 왼손 중지 신경이 잘려 피가 철철 흐르는 오전 세시, 나는 붕대로 손가락을 감고 조심스럽게 와인을 따라선 깨진 유리조각을 후후 불어가며 마셨다. 와인이 인생과 인격을 책임질 리 없지만 어떤 즐거움은 모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착각을 주니까.
가끔 와인의 연장된 감흥을 점검하는 억제제가 필요했다. 언젠가 와인 강습에 몇 번 참여했는데, 그때마다 만사를 저렇게 완두콩 공주처럼 저미며 살면 얼마나 피곤할까? 모든 것 뒤에 숨은 겹겹의 얇은 층을 일일이 들추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와인을 안다는 건 국어사전 한 질을 통째 씹어먹는 것 같은 난이도일까? 갑갑한 마음은 고귀한 날씨의 봉헌물을 대하는 태도보다 먼저였다. 그렇지만 나 역시 일상 속의 철자법과 크고 작은 매너, 그 뒤의 정서적인 보상에 충격적으로 민감한 걸 보면 누구나 각자의 규율이 있는 걸….
와인이 산업과 계층, 저널리즘과 대중 의견, 근대 비즈니스와 고급 문화 체제에 여전히 독특한 압박감을 준다는 건 내내 경이로운 일이다. 피라미드 건축가 이름은 몰라도 보르도 최고의 포도원 이름을 아는 것은 보다 섹시한 자질. 듣는 이가 대지의 생명력을 느끼건 말건 ‘메마르되 비단처럼 부드러운’ 테루아(토양, 기후 등 포도 재배 자연 조건)를 입에 올리는 수사적 거들먹거림은 언제나 통한다. “이건 특별한 흙의 기운이 담겨 있어서인지 영혼을 충족시키는 맛이 나는데?”라는 말도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는다. 관찰자와 관찰 당하는 자가 합류한 순간에는 언어가 필요하니까. 진지함이 사라진 세상에 와인이 아니라면 어디서 상상의 언어를 서술한단 말인가. 자기 것이 아닌 와인 섭렵과 블로그용 잡학을 백년 동안 읊는 것으로 모두를 따분하게 기 죽이는 사람 앞에서만은 나도 끼어든다. “나는 로마네 콩티도 마셔봤어요. 무통 로칠드를 (실수로) 바닥에 내팽개친 적도 있고요.” 돌이켜보면 로마네 콩티의 맛이 아니라 한 모금이 금값인 와인을 마실 때의 정황만 남았지.
오늘 저녁, 마음이 서성거려져서 내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타인이 강요하는 행복의 윤리는 듣고 싶지 않다. 이 순간에 대한 답으로서 와인 생각이 나는 것은 마시고 싶은 마음이 옳다는 것만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무덤 같은 도시의 익살맞은 후광 아래 부르고뉴를 땄다. 진하지 않고 얼핏 가벼워서 고양이처럼 할짝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입 안에 알갱이가 가득한 느낌이 들었다. 알갱이 느낌의 타닌이랄까. 확실히 미립자가 많은 데다 모래를 닮은 질감이 있었다. 마실수록 나는 더 나 자신이 되었다. 과장하면 ‘프롬의 마지막 밤’이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역동적인 부르고뉴를 마시는 순간의 고독은 하나, 오늘의 감흥은 나 혼자만의 것이라는 사실뿐.
아름다움에는 어느 순간에라도 관념적이고 정제된 성향이 드러나야 한다. 풍자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삶에는 디테일이 모든 것이니까. 오늘 내가 배운 것은 우리에겐 보다 장식적인 즐거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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