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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5천만원짜리 전광판으로 '박정희 흔적' 가린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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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억5천만원짜리 전광판으로 '박정희 흔적' 가린 국회

입력
2020.12.14 15:50
수정
2020.12.14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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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이후 45년간 자리 지킨 '국회의사당 준공기'
15년 전 이낙연, "유신 의식 담겨" 철거 논란
국회, 환경개선 명목 전광판으로 '역사 가리기'

지난 1975년부터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민원실 현관 벽면에 자리잡고 있던 '국회의사당 준공기'(위 사진)'가 최근 설치된 대형 LED전광판(아래 사진)에 의해 가려져 있다. 오대근 기자

지난 1975년부터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민원실 현관 벽면에 자리잡고 있던 '국회의사당 준공기'(위 사진)'가 최근 설치된 대형 LED전광판(아래 사진)에 의해 가려져 있다. 오대근 기자


1975년 9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회의사당 준공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5년 9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회의사당 준공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회 의사당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흔적이 사라졌다. 정확하게는, 가려졌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민원실 현관 대리석 벽면엔 1975년 8월 15일부로 작성된 '국회의사당 준공기'가 새겨져 있었다. 정일권 당시 국회의장 명의로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건설의 의미를 담은 이 준공기는 가로 약 10m 길이의 대리석 설치물로, 지난 45년간 한자리를 지켜 왔다. 그런데, 최근 그 앞에 대형 LED 전광판이 설치되면서 자연스럽게 가려졌다.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국회의사당 준공기는 45년 전 처음 새길 당시엔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문구에서 야당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아 국회의사당 준공식에 불참할 만큼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국회를 오가는 이들이 별 의미 없이 스쳐지나는, 그저 그런 기념물 정도로 전락했다.

국회의사당 정문 현관도 아닌 후문에 설치돼 있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준공기가 관심을 끌기 시작한 건 노무현정부 시절이던 15년 전 이낙연 당시 민주당 의원에 의해서다. 2005년 9월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 의원이 국회의사당 준공기를 거론하며 ‘국회 차원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국회 민원실 현관 앞에 설치되어 있던 '국회의사당 준공기'. 15년 전 이낙연 당시 민주당 의원은 붉은색 선으로 표시된 문구가 '유신 정신'을 담고 있다며 문제삼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회 민원실 현관 앞에 설치되어 있던 '국회의사당 준공기'. 15년 전 이낙연 당시 민주당 의원은 붉은색 선으로 표시된 문구가 '유신 정신'을 담고 있다며 문제삼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회의사당 준공기' 중 일부를 확대해 보면 '박정희 대통령'과 '포부' '영단' 등의 단어가 눈에 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회의사당 준공기' 중 일부를 확대해 보면 '박정희 대통령'과 '포부' '영단' 등의 단어가 눈에 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시 이 의원은 준공기의 문구 중 ‘장엄한 의사당은 박정희 대통령의 평화통일에 대한 포부와 민주전당으로서의 웅대한 규모를 갖추려는 영단에 의하여 우리들의 지식과 성력과 자원과 기술을 총동원하여 이룩해 놓은 것이다’라는 문장을 문제 삼았다. 그는 이 문구가 대통령의 시혜로 국회가 건립됐음을 강조하고, 삼권 위에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유신 의식’을 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 후 준공기를 두고 '박정희 현판'이라는 논란이 이어졌고, 정치권에서 전체 또는 부분적인 ‘박정희 흔적 지우기’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2~3년 후 보수정권인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논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후 10여년 만에 다시 진보 성향의 문재인정부가 들어섰고, 준공기에 대한 논란은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다양한 여론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끝에 국회는 완전한 ‘철거' 대신 '가리기’라는 절충안을 택했다. 준공기를 없애지 않고 그 앞에 대형 LED 디스플레이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검은색 화면장치가 '준공기념물' 앞으로 설치되어 있다. 오대근 기자

검은색 화면장치가 '준공기념물' 앞으로 설치되어 있다. 오대근 기자

이 같은 합의에 의해 최근 준공기가 부착된 국회 민원실 현관 벽면에 가로 12m, 세로 3m, 두께 70㎝ 크기의 대형 스크린이 등장했다. 이르면 다음 주부터 국내 자연경관을 담은 영상 또는 국회 이미지를 소재로 한 미디어아트, 외빈 및 방문객 환영 메시지, 각종 행사 안내 등이 상영될 예정이다. 국회사무처는 '박정희 지우기' 논란을 의식한 듯 해당 전광판에 대해 '공간개선' 사업이라는 명목을 내세웠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기나긴 논쟁의 결과로 그의 흔적에 대한 '지우기'인지 '가리기'인지, 아니면 단순한 '환경개선' 사업인지 모호한 대형 설치물이 세워졌고, 여기에 국민 혈세 3억5,000만원이 투입됐다.


준공기념물이 설치된 대리석의 벽면을 화면장치가 덮여져 가리고 있다. 오대근 기자

준공기념물이 설치된 대리석의 벽면을 화면장치가 덮여져 가리고 있다. 오대근 기자


오대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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