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 에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집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 속 한 장면에서 시작했다. 사랑하는 여성을 찾으러 포르투갈의 한 마을 골목을 헤매는 콜린 퍼스를 따라 온 동네 사람들이 줄줄이 노래하며 골목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다. 2년 전 두 아이(현재 9세, 6세)와 함께 살 집의 설계를 부탁하러 온 정범희(39) 배진희(35) 부부에게 건축가는 대뜸 이 영상부터 보여줬다. “영상을 보여주고 별다른 설명 없이 이런 거라는 거예요. 솔직히 처음엔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리둥절했지만 어떤 집일지 궁금해졌다. 설계를 맡은 한승재 건축가(푸하하하프렌즈 건축사사무소 공동소장)는 “영상만 보고 공감할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부와 얘기하다 보니 공감을 해줄 것 같았다”라며 “말로 설명하긴 어려워도 그때 서로 통한 게 없었다면 아예 다른 형태의 집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골목과 계단 품은 집
디자인을 전공한 부부는 10년 전 일본에서 함께 유학 생활을 했다. “그 때 둘이 살 집을 구하러 다녔는데 스킵플로어(반층 구조) 같은 새로운 구조가 많은 걸 보고 집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에 들어와 획일적인 구조의 아파트에 살면서 집에 대한 꿈은 더 간절해졌다. “저희 둘 다 집 꾸미는 걸 좋아하고, 관심도 높았지만 우리한테 맞는 공간에 살려면 집을 짓는 수밖에 없었어요.”
부부는 서울 연희동의 오래된 주택가에 계단을 끼고 있는 비탈진 땅(대지면적 147.54㎡)을 샀다. 그 동네에 20년간 살았던 한승재 건축가도 개와 산책하며 익히 봐왔던 곳이었다. 건축가는 “땅 옆에 있는 계단 끝이 막다른 골목인데도 매번 개가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돌아오곤 했다”라며 “여기에 집을 짓게 되면 그런 흐름들이 잘 이어지도록 해야겠다는 상상을 했다”고 말했다.
운명처럼 부부가 그를 찾아왔다. 아내는 ‘아이들이 바닥에서 퐁 뛰어내리면서 마음껏 뛰노는 집’을, 남편은 ‘조형적으로 아름답지만 과시하지 않는 집’을 원했다. 부부의 요구 조건은 건축가가 생각했던 집과 비슷했다. 건축가는 “넓고 마당이 있는 집을 원했다면 애초에 영화 얘기도 못 꺼냈을 것”이라며 “부부가 원하는 집이 제가 그 동네와 어울린다고 생각한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상상과 현실의 줄타기 끝에 올해 2월 붉은 벽돌을 두른 2층집(연면적 218.10㎡)이 완성됐다. 마치 박스 안에 든 원통처럼 벌어진 외부의 벽 틈새로 내부에 둥근 벽돌 벽이 하나 더 있다. 건축가는 “아이들이 동그랗게 뛰노는 동선을 고려했고, 마당을 둘 경우 주변 어디에서나 집이 들여다보일 수 있는 점을 피해 일단 집을 안으로 동그랗게 모았다”고 설명했다.
테두리처럼 외부에 벽을 한번 더 두른 것은 집 밖의 골목과 계단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집 밖 계단에서 대문을 지나 들어오면 집 안 골목이 나타난다. 두 개의 벽 사이로 자연스레 생긴 공간이다. 폭 1m 안팎의 골목길은 집 안팎으로 자유롭게 이어진다. 부부는 “완공되고 나서야 처음에 봤던 영화 장면이 이해가 됐다”라며 “골목과 계단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과 동선의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두 개의 벽 사이에 난 골목은 투명한 현관을 지나 집의 중심을 관통하는 널찍한 계단으로 이어진다. 거실이나 방의 면적을 한 뼘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현관은 작게, 계단은 좁게 만들었던 기존의 건축 공식들을 단박에 뒤엎은 시도다. 건축가는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이나 계단이 어둡고 비좁으면 내 집 같지 않다”라며 “현관과 계단을 좋은 자리에 둬야 집의 모든 공간이 내 집 같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과시하지 않는 집을 원했던 부부의 요구를 건축가는 숨겨진 창으로 풀어냈다. 거실과 주방이 있는 1층의 창은 최소화했다. 북향의 거실 창은 눈높이 아래 둥근 벽을 따라 좁고 길게 나 있다. 마당에 핀 키 작은 식물이 겨우 보일 정도다. “밖에서 창문으로 보이는 집 안의 풍경이 일종의 과시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최대한 밖에서 보이지 않게 창을 숨겼어요.”(건축가)
삶을 돌아보고, 꿈꾸는 집
계단을 오르면 숨겨진 창들이 서서히 드러난다. 계단 위로 길게 천창을 냈고, 계단에 올라 뒤를 바라보면 천창에서 이어진 긴 세로 창에 산 아래 동네 풍경이 정겹게 담겨 있다. 천창에서 계단으로 떨어진 빛들은 1층으로 퍼진다. 창을 최소화한 1층에 비해 2층은 4m가 넘는 높은 천장을 이용해 남향으로 큰 창을 냈다. 외부 시선을 피하면서 채광을 확보한 것이다.
집 안 골목은 2층에서도 순조롭게 이어진다. 계단을 중심으로 우측부터 작은 방과 욕실, 부부의 방이 둥글게 이어지고 부부의 방에서 다리를 건너듯 아이들 방으로 연결된다. 아이들 방을 관통하면 다시 계단으로 돌아오는 순환 구조다. 방마다 미닫이문을 달았지만 거의 열어 둔다. 부부는 “둘이 원룸에 산 적도 있어 욕실이나 화장실을 이용할 때를 제외하곤 방문을 안 닫고 사는 데 익숙하다”라며 “아파트와 달리 층이 분리돼 있고 구석구석 공간이 있어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했다.
아이들은 마음껏 집을 누빈다. “아파트에 살 땐 아이들이 매일 밖에 나가고 싶어했어요. 답답하니까요. 그런데 요즘처럼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아이들이 답답해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아요. 계단도 오르내리고, 여기 저기 집안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알아서 잘 놀아요.”(배진희)
부부도 달라졌다. 집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꿈을 꾼다. “아파트는 당연히 주어진 공간들이 많잖아요. 이 집은 구석구석 저희가 고심해서 만든 공간이에요. 공간을 통해 우리 얘길 많이 담고, 스스로도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게 됐어요. 앞으로의 삶도 종종 그려봐요. 아이가 크면 벽을 허물고 지하와 연결해 방을 만들까, 자전거 고치는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까, 이런 즐거운 생각이 가득해요.”(정범희)
집은 애칭이 있다. ‘희희희’. 부부의 이름과 동네 이름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희’자를 연결했다. 부부가 ‘희희희’ 웃자 건축가도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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