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언론 유착, 성희롱, 접대문화...한국 조직 공통의 병폐죠"

알림

"언론 유착, 성희롱, 접대문화...한국 조직 공통의 병폐죠"

입력
2020.12.17 04:30
수정
2020.12.17 13:38
20면
0 0

신작 소설 '젠가' 출간한 정진영 작가

정진영 작가는 올해 초 큰 교통사고를 겪은 뒤 회사를 그만뒀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다가 죽고 싶진 않았고, 그렇게 전업작가가 됐다. 왕나경 인턴기자

정진영 작가는 올해 초 큰 교통사고를 겪은 뒤 회사를 그만뒀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다가 죽고 싶진 않았고, 그렇게 전업작가가 됐다. 왕나경 인턴기자


“기자라면 한 명쯤은 잊지 말고 끝까지 파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JTBC 드라마 ‘허쉬’에서 인턴기자 이지수(임윤아)는 이렇게 말한다. ‘기레기’의 시대, 여전히 기자가 그런 존재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유효할까. ‘허쉬’의 원작소설인 정진영 작가의 ‘침묵주의보’는 월급쟁이 기자들의 고단한 일상을 핍진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그 답을 대신한다. 여기에 위선과 기만, 차별과 부조리처럼 어느 조직에서나 발견되는 썩은 부분을 과감히 드러내 보이며 언론의 문제가 결국 우리 사회 공통의 문제임을 말한다.

최근 출간된 정 작가의 신작 ‘젠가’는 ‘침묵주의보’에 이어 한국 조직 사회의 병폐를 또 한번 낱낱이 까발린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11년차 신문기자 겸 소설가였지만, 지난 2월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로 나선 그를 15일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침묵주의보를 언론사 얘기로만 한정하기는 어려워요. 회사라는 조직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제가 경험했고, 그래서 가장 잘 아는 조직이 언론사여서 배경이 된 것뿐이죠. ‘침묵주의보’가 서울 수도권에 있는 기업을 다룬다면 ‘젠가’는 지방 소도시의 전선(電線)업계가 중심이 됩니다. 사실 지방 기업은 문제가 더 심각해요. 언론의 감시 기능도 약하고, 비리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거든요.”

월급쟁이 기자들의 밥벌이 라이프를 그린 드라마 '허쉬'는 정 작가의 소설 '침묵주의보'를 원작으로 한다. 키이스트, JTBC스튜디오 제공

월급쟁이 기자들의 밥벌이 라이프를 그린 드라마 '허쉬'는 정 작가의 소설 '침묵주의보'를 원작으로 한다. 키이스트, JTBC스튜디오 제공


‘젠가’의 모티브가 된 건 실제 2013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원전 비리 사건이다. 품질 기준에 미달하는 부품들이 시험성적서 위조를 통해 수년간 한국수력원자력에 납품돼온 사실이 적발됐다. 부품 제조업체였던 JS전선과 검증기관, 한전까지 조직적으로 가담한 것이 밝혀져 사회적 파장이 컸다. 관련된 100여명이 기소됐고 공식적으로 추산된 피해 규모만 9조 9,500억원에 이른다.

실제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하기 위해 A4 70장에 달하는 판례부터 논문들을 샅샅이 훑었다. 가상의 광역시 ‘고진시’와 이곳의 대표기업인 ‘내일전선’, 그리고 다양한 관련인물의 교차하는 욕망을 그린 소설 ‘젠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지역과 직종은 바뀌었어도 학연과 지연, 접대문화, 기업과 언론 유착, 성추행 등 한국 조직 특유의 폐단은 그대로다. 특히 모든 등장인물을 추동하는 힘이 선의가 아닌 각자의 이기심이라는 점에서, 히어로가 문제를 바로잡는 직장활극의 쾌감 대신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이는 철저히 작가가 의도한 바다.

“세상이 어느 한 명의 불타는 정의감으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소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고요. 다만 이런 지리멸렬한 세상을 소설에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은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게 되겠죠. 그런 뒤 책을 덮고 나면, 나름대로 자기 삶의 변화를 꾀할 수도 있고요. 그 한명 한명의 변화가 모이다 보면 그래도 세상이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요.”

15일 오전 한국일보 본사 16층에서 드라마 '허쉬'의 원작소설 '침묵주의보'의 정진영 작가가 신작 '젠가'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왕나경 인턴기자

15일 오전 한국일보 본사 16층에서 드라마 '허쉬'의 원작소설 '침묵주의보'의 정진영 작가가 신작 '젠가'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왕나경 인턴기자


정 작가는 소설가로서 이력보다 배우 박준면의 남편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나 부부가 됐다는 솔깃한 화제성 덕에, 부부 관찰 예능 출연 제의도 몇 번이나 받았다. 배우 박준면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지만, 그래도 이제는 ‘소설가 정진영’으로 더 널리 알려지고 싶단다.

“회사를 그만둘 때만 해도 아내가 뮤지컬 공연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라 당분간은 얹혀 살아도 되겠구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공연이 다 취소돼서, 이제는 제 소설이 잘나가는 수밖에 없어요.(웃음)”

요즘에는 침묵주의보-젠가에 이어 ‘조직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할 소설을 구상 중이다. 언론사와 전선회사를 잇는 조직은 다름아닌 국회다. 여당 비례대표 출신의 전직 국회의원과 함께 우리나라 정치의 심장부를 해부하는 소설을 구상 중이다. 정 작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인물들도 많이 등장할 것”이라 귀띔했다.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꿰뚫지만, 정작 작가는 ‘사회파 작가는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데뷔작인 ‘도화촌 기행’이 판타지문학상을 수상했던 터라 처음에는 장르소설 작가로 인식됐고, 요새는 사회파 소설가라고 많이들 생각하세요. 하지만 올 봄에는 가족소설을 썼고 곧 출간될 새 책은 연애소설이에요. 대단한 문학은 안 하고요, 다만 무조건 3시간 안에 독파 가능한 재미있는 소설을 많이 써서 그걸로 먹고 사는 게 목표입니다.”

한소범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