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저는 연년생 중학생 남매를 키우는 아빠입니다. 첫째인 아들과 달리 둘째인 딸은 어렸을 때부터 순했습니다. 아들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떼를 써서 얻어냈지만 그때마다 딸은 대부분 필요 없다고 하거나 항상 저렴한 것만 골랐어요. 자전거를 탈 때 보호구를 착용하라고 하면 더운 여름에도 땀을 흘리며 보호구를 맸던 아이예요. 먼저 얘기하지 않아도 가족들 생일, 부모 결혼기념일을 챙겼어요.
학원 다닐 때도 가기 싫다는 얘기를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었고, 성적도 늘 상위권이었습니다. '힙합음악은 가치관에 혼란을 줄 수 있으니 많이 듣지 마라' '냄새가 많이 나는 마커펜으로 그림 그리지 마라' 같은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딱히 갈등은 없었어요. 그에 비해 아들은 사춘기가 심하게 와 저희 부부와 상담을 다닐 정도로 갈등이 많았죠.
그런데 얼마 전부터 딸이 돌변했어요. 진하게 화장을 하고, 학교나 학원을 무단으로 결석하고, 밤새도록 휴대폰을 하고, 집에도 늦게 들어옵니다. 최근에는 아예 외박을 하고 사흘간 집에 들어오질 않았어요. 저도 술에 취해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닫힌 아이 방문을 가위로 찍고, 딸한테 손찌검을 했어요. 진한 화장을 한 딸에게 ‘술집 나가냐’고 상처도 줬어요. 다음날 바로 사과했지만 딸은 아빠가 자길 죽일 것 같다며 집을 나가버렸어요.
딸이 어울리는 애들도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불량한 아이들과 노는 걸 보니 너무 두렵고 초조해집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다 들키기도 했어요. 그 친구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하면 펄펄 뛰면서 화를 냅니다. 사실 친구들만 떼어 놓으면 귀가시간은 지킬 것 같습니다. 귀가시간은 밤 9시30분으로 정해놨습니다. 딸에게 집에 왜 안 들어오냐고 하면 ‘답답하고 공부하기 싫어서’라고 합니다.
낭비도 심합니다. 중저가 옷은 창피해서 못 입겠다며 명품을 사달라고 하고, 사줬더니 다른 아이에게 주고 정작 상표도 없는 다른 아이 옷을 입고 들어왔어요. 일부러 새 휴대전화를 사달라며 쓰던 기기를 망가뜨리고, 새 옷을 사려고 이전까지 입던 옷을 죄다 갖다 버립니다.
저는 어렸을 때 부모와 좋은 추억이 없어 아이들과는 늘 잘 지내려고 노력했어요. 제 아버지는 일 때문에 10년 넘도록 주말에만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늘 차가웠어요. 초등학교 때는 받아쓰기를 못하고 말을 안 듣는다며 점을 보러 가자고 했고, 한번은 제게 부엌칼을 내놓으며 죽으라고 했어요. 지금까지도 어머니와는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아이들과도 갈등을 겪으니 정말 모든 걸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괴롭습니다.
김영준(가명ㆍ47ㆍ회사원)
영준씨, 당신의 사연에서 사랑하는 딸의 달라진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고, 아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고, 하루하루 변하는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암담해하는 부모로서의 깊은 절망감이 느껴져 안타까웠습니다.
우선 사연만 놓고 보면 아이의 행동에 대한 정보는 나열돼 있지만 당시 당신이 느꼈던 감정이나 아이의 감정이 쏙 빠져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고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보이지 않는 감정 소통에는 부족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어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감정 소통은 매우 중요해요. 제가 말하는 소통은 아이가 필요한 것을 요구하면 그것을 공급해주는 소통이 아니라, 아이가 겪는 다양한 상황이나 감정, 생각을 부모와 나누고, 부모가 이를 수용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생각을 알아주고 받아주는 걸 말합니다. 다 들어주라는 것이 아니라 수용적 자세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힘들다고 할 때나 부모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할 때 이렇게 말하는 부모도 있어요. ‘네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고 먹고 싶은 거 다 먹이고 잘 입히고 비싼 학원도 보내주는데 뭐가 부족해서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고 다니면서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너한테 전교 1등을 하라고 그러냐, 돈을 벌어오라고 그러냐, 우리는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고 너 하나 잘 키우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살았는데 도대체 너는 뭐가 부족해서 그러냐’라고요. 그저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배우고 싶다는 거 가르치고, 다치지 않게 해주고, 필요한 것을 사주면 부모 할 일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이도 충분히 만족할 거라고 여기는 거지요.
영준씨가 딸에게 한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을 거예요. 자전거 탈 때 보호장비를 해야 하고, 학교도 빠지면 안 되는 게 맞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이 잘 크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심입니다. 아이가 외박과 가출을 하고 학교를 빼먹고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고 술, 담배를 하면 부모들은 크게 실망하고 기가 막히고 망연자실합니다. 부모는 그저 아이가 괘씸할 뿐이지요. 영준씨도 당연히 딸아이를 호되게 나무랐겠지요.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어땠을까요. ‘집에 있기 싫다고, 학교에 가기 싫단 말이야. 언제 엄마 아빠가 내가 해달라는 걸 다 해줬어! 아빠는 혼만 내고 나한테 공부하라는 말밖에 더 했어?’ 아마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아이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빠가 해주는 것에 부족함이 없는지 물어보지 않고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거나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야단을 치며 잔소리나 하지 않았을까요. 아이가 왜 공부를 등한히 하고 밖으로 도는지 집에 있는 것을 왜 싫어하는지 궁금해 하지 않고, 괘씸해하면서 실망한 마음을 말로 가감 없이 표현하고 노여워하지 않았을까요.
아이는 부모로부터 도망가고 싶을 만큼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부모는 그런 아이의 마음을 몰라주는 거지요. 제가 느끼기에 당신은 굉장히 올바르고 합리적이에요. 부모자식 관계에서는 합리적이면서도 감정적 교류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지나치게 합리성과 올바름만 앞세운 게 아닐까 우려됩니다.
부모와의 감정적 소통이 잘 되지 않으면 아이들은 극도로 외로워집니다. 힘들고 불안한 것을 얘기하고 싶은데, 알아주지 않으니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답답해지죠. 감정적 불통이 지속되면 아이는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고 급기야 부모가 미워지게 되지요.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불안한 시기에 부모가 자신을 중요한 대상으로 대해주지 않는다고 느끼면 아이는 불안에 떨게 됩니다. 아이는 힘든데, 부모가 ‘네가 뭐가 힘들다고 그래, 따뜻한 옷 입히고 배불리 먹여주고, 너 배우고 싶다는 거 다 해주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라고 한다면 아이는 얼마나 힘들고 절망스러울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 행동에 대해 하나하나 집어서 혼을 내고 고치지 않을 경우 벌까지 주면, 아이는 부모가 자기를 걱정하고 사랑한다고 느끼기보다 공격한다고 느끼는 한편 안전해지기 위해 집과 부모로부터 거리를 두게 됩니다.
딸은 기질적으로 다정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아이 같아요. 아들과 달리 안 그랬던 아이가 갑자기 문제 행동을 하는 것은 너무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힘들고, 우울한 것의 반증일 수 있어요. 오빠와 부모의 갈등을 옆에서 보면서 딸은 부모에게 덜 혼나려면, 부모의 마음에 들려면, 요구하지 않고 마음을 표현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편안하고 안정된 상태여서 표현할 필요가 없었거나 말을 잘 들은 게 아니라, 혼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표현을 안 했을 겁니다. 딸은 부모와의 강렬한 감정 소통, 결속력이 너무나 중요해서 참고 억눌렀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준씨가 느끼기에는 하루아침에 딸이 달라졌을지 몰라도 오랫동안 딸의 밑면에 깔린 마음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우울했을 거예요.
아이들은 감정적으로 불안하면 강력하게 감정적인 결속을 형성할 대상이 필요해지죠. 그게 친구였을 거예요. 친구와 끈끈한 결속력이 생기면 덜 불안하고, 덜 외로웠을 겁니다. 물론 부적절합니다. 또래는 보호자가 아니고, 딸이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과 좌절을 의논하고, 도움을 주고 받을 대상이 아니니까요. 딸에게 친구는 재미있고 좋아서 어울리는 게 아니라,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모호한 불안감과 외로움을 동시에 해결해주는 부모 같은 대상일 거예요. 그래서 딸에게 친구들과 같이 있지 말라고 하면 공포스러울 겁니다.
딸도 외박을 하고, 술을 마시는 게 옳지 못한 행동이라는 걸 알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감정적인 문제가 큽니다. 부모가 ‘너 바보니, 왜 그런 애들이랑 어울려’라고 다그치기보다 ‘그 친구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좀 편하니, 집에 있는 것보다 거기에 있는 게 더 안정이 되니’라고 아이의 마음부터 헤아려주는 게 필요합니다.
늦게 왔다고 딸의 방문에 가위를 찍고, 딸에게 ‘술집 다니냐’라고 말하면 아이는 집과 아빠를 자신을 공격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아무리 속상해도 딸의 행동의 일부를 가지고 인격을 모독해선 안 됩니다. 딸은 인격에 문제가 있는 아이가 아니니까요.
딸과 감정 소통의 길을 닦으려면 우선 아이에게 힘들 때 언제라도 돌아올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 부모와 집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야 해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아이의 생활과 안부 인사면 충분합니다. ‘추우니깐 따뜻하게 입고 다녀’ ‘밖에서 사 먹더라도 맛있고 좋은 걸로 먹어’ ‘걱정되니깐 늦더라도 잠은 집에 와서 잤으면 좋겠다’ 정도로 시작해보세요. 통금 시간은 정해놓지 마세요.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아이는 집에 들어가는 게 더 두려워집니다. 지켜야 하는 룰도 많이 만들지 마세요.
아이가 휴대전화나 옷 등을 무리하게 사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를 부모가 들어주는 것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예요. 영준씨는 주로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방식으로 아이들과 소통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요구가 무리할수록 사랑이 크다고 느끼고,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수록 부모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상황이라고 생각이 들어 마음의 안심이 들 거예요.
어떻게 집에 안 오는 딸을 가만두고 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딸은 혼내서 바로 잡아야 할 못된 송아지가 아닙니다. 치료가 필요한 만큼 아이 마음이 힘든 거예요. ‘네가 그렇게까지 힘든 것을 늦게 알아서 미안하다. 부모인 우리가 왜 영향을 안 줬겠니. 네 마음이 더 힘들지 않게 같이 노력하고, 의논해보자’라고 따뜻하게 대해 주세요. 당신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됐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딸과의 관계에서 당신을 먼저 돌아봐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얘기를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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