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오랜 번역의 역사를 갖고 있다. 외래 종교나 문화를 한문(漢文)으로 옮기는 1,500여년의 세월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물은 불교 경전의 번역으로, 바로 ‘대장경(大藏經)’의 성립이 그것이다. 불경이 한역(漢譯)됨에 따라, 차츰 인도 불교에 대한 의존이 줄어들고 독자적인 중국 불교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한문으로 된 대장경이 완성되자 불교는 중국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다. 불교가 재탄생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경 번역 역사에서 대표적 인물은 구마라집(鳩摩羅什·350~409)과 현장(玄?·600~664)으로, 그들은 번역 이론 수립에도 기여하였다. 구마라집은 이런 말도 했다. “번역은 다른 사람이 씹어준 음식과 같다.” 원문의 풍미가 사라진다는 점을 상기시킨 것이지만, 달리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탁월한 번역가였던 그가 번역 회의론자였던 셈이다.
번역의 원칙은 저마다 다르다. 불경 번역에 참가한 승려들 사이에도 ‘문(文)’과 ‘질(質)’에 대한 논쟁이 생겼다. 간단히 말하면 원전 그대로를 살리자는 ‘질’파와 번역어의 유려함과 가독성을 중시하는 ‘문’파의 대립이었다.
성경의 한문 번역 양상도 궁금했었는데, 최근에 채희배 선생이 20세기 초에 나온 한문 성경을 교감하고 우리 음을 부기한 서물의 일부분을 보게 되었다. 저본은 영국의 지원을 받은 중국인들이 한역한 ‘King James 버전 성경’인데, ‘문’파 경향의 작품이다. 선교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인 책이라서 압축미가 있고 운율과 자수가 정제되어 한문 공부에 제격이었다. ‘누가복음(路加福音·Luke)’을 읽는데, “利盡天下, 而自喪自亡, 何益之有”(For what is a man advantaged, if he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mself, or be cast away)에서 ‘利盡天下(리진천하)’와 뒤 구절의 호응이 이상하여 질정해 보니, 대학자 황종희(黃宗羲·1610~1695)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원군(原君)’에서 한 대목을 차용하여 압축한 말이었다.
“태초부터 인간은 각기 ‘자사(自私)’와 ‘자리(自利)’를 갖고 있었다.” ‘원군’의 대전제이다. ‘자사’는 개인의 고유한 삶과 지향, ‘자리’는 저마다 추구하는 이로움이다. ‘자사’와 ‘자리’는 천부적인 것이므로 존중받아야 하고, 군주는 백성들의 그런 욕구를 원만하게 조정해야 한다. 다만 이 역할이 너무 수고로운 일이어서 옛 성인들은 임금 자리를 마다하거나 부득이 맡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후세에 오면서 ‘공(公)’을 자처하는 인물이 나와 본래 임금의 역할을 왜곡했다고 한다. 군주 자신이 ‘공’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강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리(公理)’라는 거창한 수사를 내세운 지배층이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명나라 말기 사회에 대한 통박이다. 백성들은 숨을 못 쉬겠는데 황제나 권력자들은 아니라고 한다. 백성들이 자신의 말에 순종해서 사리사욕을 없애면 된다고 말할 뿐이다. 황종희는 현실에 통분한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절대 권력의 행태 때문이다.
“따라서 천하에 큰 해가 되는 것은 군주뿐이다! 이전에 군주가 없을 때에는 사람들이 각자 ‘자사’와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후세의 군주들은 천하의 이로움과 해로움의 권한이 모두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여, 천하의 이익은 모두 자기에게 돌리고(天下之利盡歸於己), 천하의 해로움은 모두 남에게 돌리면서도(天下之害盡歸於人) 전혀 거리낌이 없다. 모든 사람이 ‘자사’와 ‘자리’를 추구하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의 매우 사사로운(大私) 일은 천하의 지극히 공적(大公)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위 대목에 나온 ‘天下之利盡歸於己’를 ‘利盡天下’로 압축하여 성경에 썼다. 영어와 나란히 놓고 보니 엄청난 내공을 보여주는 번역이다. 황종희의 깊은 사색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대사(大私)’를 ‘대공(大公)’이라고 우기는 장면을 하도 봐서인지 마지막 구절은 금방 알아들었다.
결론, ‘누가복음’ 9장 25절의 우리말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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