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엄마]<1>야구 레전드 고 최동원의 어머니 김정자
“아들 보낸 지 10년, 내 심장이 됐다”
동상 가면 ‘엉디’부터 쓰다듬는 이유
“어무이… 아파요” 피눈물 나는 기억
“동원아, 내 아들 잘 있나. 이제 아프지도 않고 행복하제? 거기도 니 좋아하던 클래식 노래가 있나. 거는 고통도, 걱정도 없는 참 좋은 세상이겠제? 엄마는 오늘 서울서 부산일보의 기자들이 이 먼 데까지 내리와가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하고마, 우짜노. 내가 와 한국일보를 부산일보라 해뿌맀나…”
괜찮습니다. 여든 여섯, 그 연세 엄마들의 흔하고 귀여운 실수인 걸요. 배시시 웃는 이 분, 야구의 전설이라 불리는 ‘무쇠팔’ 투수 최동원 선수(2011년 53세로 작고)의 모친 김정자(86)씨입니다.
“동원아, 니 기억 나나. 토성중학교(경남중) 때인가, 경남고 때인가 엄마가 (교사로) 근무하던 학교에서 행사가 있어서 다른 학교 선생님들이 온 기라. 양과자점에서 간식을 대접하는데 선생님들이 그러는 기다. ‘이 봐라, 이 봐라. 듣자니까 마 이 학교에 최동원 선수 어머이가 있다 카던데. 사실이가?’ ‘그렇단다.’ ‘정말이가, 정말이가?’ 내가 싱긋 웃음서 ‘내가 최동원이 어머입니더’ 하니 다들 깜짝 놀래가 ‘참말입니꺼, 참말입니꺼’ 되묻는 기라.
그날 마음이 너~무 좋길래 저녁에 집에서 ‘동원아, 동원아. 니는 ‘어머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선생인가’ 하고 누가 물으면 좀 챙피하제?’ 하니까, 니가 ‘어무이! 무슨 말을 합니꺼. 나는 어무이가 학교 선생님이라 얼마나 자랑스럽고 좋은데예. 우리나라의 새싹들을 가르치는 귀한 일을 하시는 거 아입니꺼’ 했제. 그 말이 얼마나 좋았던가 ‘아이고! 내 아들아, 엄마 그럼 앞으로 어깨 쭉 피고 다닐꾸마’ 하면서 꽉 안아줬제.”
엄마의 눈 앞엔 열일곱 아들이 있는 듯합니다. 눈까지 질끈 감고 저릿하게 안는 시늉을 하며 그날을 떠올립니다. 아들 삼형제 중 맏아들인 최동원 선수를 엄마는 스물셋에 낳았습니다. 63년 전이지만, 태몽을 잊을 리가요.
“낮잠을 이래 자고 있는데 뱀이 내 발끝에서부터 슬슬 기서 배까지 올라오는 기라. 너무 징그러버서 몬 올라오게 두 손으로 팍 쥐아따. 그 바람에 놀래서 깼제. 일어나 보니 아무것도 없고 등어리서 땀이 줄줄 흐르는 기라. 그때는 그기 태몽인지 몰랐제. (부산) 범일동에 있는 산부인과서 낳았는데, 아가 너무 커 가지고 엄마가 좀 고생을 했다. 근데 힘들게 낳아서 동원이 니를 봤는데 요 인중에서 턱까지보다, 이마 길이가 더 긴 기라. 아가 안 나와가 너무 쉬고, 쉬고 해서 그랬는가, 마 ‘우짤끼고’ 싶어서 틈 나는 대로 얼굴을 위아래로 눌라줬제. 석원이랑 수원이 때는 그래 몬 했는데 동원이 니는 세 살까지 엄마 젖을 뭇다. 그 덕분인가 국민학교 때도 다른 친구들보다 힘도 세고 등치도 컸구마.”
◇죽을 뻔한 아들 두 번이나 살렸는데...
자식 키우며 가슴 철렁한 일이 왜 없었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마 식겁한 일이다. 니 어릴 때 두 번이나 죽을 뻔 한 거를 살렸다 아이가. 한번은 아였을 때 구덕(공설)운동장에서 시민의 날이라꼬 탈렌트도 오고, 가수도 오고 행사를 해서 동원이 니를 업고 구경을 갔제. 근데 마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기라. 집이 가까우니까는 바로 우산 가지러 가는데 비가 막 쏟아지는 기다. 길가 처마 밑으로 가 쉬는데 사람들이 마 (운동장에서) 쏟아져 나오다가 엉기고 깔려서 큰 사고가 났다 아이가. 죽은 사람이 그렇게 많아. 나중에 그기 신문에도 났어.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랬는지 마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했다. 내가 그때 우산 가질러 간다꼬 안 나왔더라면 우쨌으까 싶은 기제. 그런 기 지금도 엄마는 생~생해.
니 국민학교 다닐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야구 연습하고 와서 너무 피로한 거 같다고 하기에 니 아부지가 오늘은 아들 옆에 가서 자는 기 어떻겠냐고 해서 니랑 동생들 사이에 마 낑기가 잔 일이 있지 않나. 너그는 엄마가 함께 잔다고 마 좋다꼬 했제. 근데 잠이 이래 들라 카면 뭣이 탁 하는 소리가 나. 불을 켜니까 동원이 니가 공중으로 팔, 다리를 마 올리고는 덜덜덜 떨고 난리가 났어. 내가 막 고함을 질러서 할무이, 할아부지, 아부지 온 가족이 다 깨서 달려왔제. 통금 시간이어도 골목으로 의사를 막 불러가 델꼬 와서 보니, 니 가슴부터 열고 보더꾸마. 그러더니 심장께에 주사를 주더니마는 옆으로 누파 놓고 등어리를 이래 몇 번 쓰다듬고는 몇 번 탁탁탁 치니까 뭣이 입에서 튀어 나와. 껌인 기라. 껌을 씹다가 잠이 들어가 그기 목구멍에 늘어붙어서 맥히니까 숨이 안 쉬어진 기제. 의사 선생님이 ‘인자 됐습니다’ 하는데, ‘어쩔 뻔 했노’ 싶어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이가. 지금 생각해도 눈앞이 캄캄하고 아찔하다.”
엄마의 입에서 엄마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옵니다.
“동원이 니는 참 의지가 강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니가 하고 싶다 하기도 했고, 체격이 커서 살이나 뺄까 싶어서 재미로 들어간 야구부 감독님이 제대로 해보면 어떻겠나 묻기에 가족회의를 안 했나. 할아부지랑 아부지는 ‘본인이 할라 카기만 하면 좋다’ 이라고, 할무이는 ‘아이고, 장손인데 운동하다 다치면 우짜노’ 걱정을 하셔서 마지막에 할아부지가 ‘니는 우찌 생각하노’ 물으셨제. 엄마가 보기에는 동원이 니는 성적이 5등 아래로는 안 내려갔어도 머리가 좋아서라기보다 노력형이었거든. 본인만 꾸준히 한다 하면 운동을 시켜도 뼈대도 굵고 힘도 세니까 잘 하지 않겠나 싶었제. 그래 마 마지막으로 아부지가 니한테 물은 거 생각 나나. ‘운동이란 거는 도중에 힘들다꼬 몬 하겠다 그럴라 하면 아예 시작 안 한 것만도 몬 하다. 니가 단디 생각을 해 가지고 결정을 내리라.’ 그랬더니 니가 이랬제. ‘아부지, 나는 야구만 시켜 주며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고 뚫고 나가겠심니더.’ 그 이야기를 하니까 할아부지가 ‘마 됐다’ 하셨제.
그때부터 온 가족이 달려들어서 니 뒷바라지를 했지. 집에 밭이 너르니까 마운드도 만들고 그물도 사와서 연습장을 차린 기라. 아부지는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보다 선진적이라고 평가됐던) 일본 야구 중계도 보고 공부도 해가 지도를 했지. 학교에서도 연습을 하고 집에 와서도 그만큼을 했으니 다른 선수의 두 배는 했을 끼라. 나중에 동원이 니 공은 아무나 몬 따라 한다꼬 아무나 칠 수 없는 ‘마구’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기 다~ 그 연습 덕분 아니겠나. 구질 하나당 200개씩은 매일 연습을 했으니. 자전거 타이어를 몸에 두르고 오르막길에서 차를 끌고, 맨손으로 감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고… 그런 고된 연습을 할 때마다 엄마는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린 적도 많다. 마 그때부터 커서까지 야구하면서 질 때나, 팬들로부터 안 좋은 소리를 듣거나 해도 한~번도 ‘너무 힘들어서 몬 하겠다’ 소리를 한 적이 없제. 나중에 보니 그기 얼마나 스트레스가 마이 쌓였겠노 싶어서 가슴이 아프다.”
◇아들 응원하고 나면 체중도 줄어
사람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1984년도 엄마에겐 기쁘기만 한 기억은 아닙니다. 롯데자이언츠의 간판이었던 최동원 선수는 삼성라이온즈와 붙은 한국시리즈에서 팀에 최초 우승을 안겼죠. 선발 4회에 구원 1회까지 모두 합쳐 5회 등판을 한 괴물 같은 투구였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우승 직후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아이고~ 자고 싶어요”라고 했을까요.
“몸을 안 애끼는 기는 니 아부지를 닮은 기가. 니 경기를 볼 때마다 내는 손깍지를 끼고 우찌나 용을 썼던지 나중에는 손가락이 푹푹 드가 있어. 하느님, 부처님 다 찾아 가면서 저 마운드에 서 있는 최동원이가 위기를 모면하게 해 달라고 용을 쓰는 기제. 눈을 감고 있는데도 내 영감에 ‘승’자가 보일 때가 있다. 그러면 노아웃 만루가 돼 있어도 그걸 다 잡아내고 점수를 하나도 안 주면서 해결을 해내는 기야. 그럴 때는 마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다. 그렇게 2시간을 용을 쓰고 나면 마 (몸무게가) 2키로가 줄어 있다. (1984년) 한국시리스 때도 7차전 할 때 6대 4로 8회전(8이닝)이 돼서 우짜든지 막아야 하는데 보니까 (너무 체력 소모가 심해서) 아 입이 비뚤어져 있드라. 너무 가슴이 아파 가지고… 내 참 그 심정 어떻게 말로 하겠노. 그날 축하파티에 가 앉는 것도 TV에 나왔드만, 코피가 났는가 코에 화장지를 꽂아가 있는 걸 보고 ‘아이고 동원이 고생했다, 내 아들 고생했다’ 몇 번을 외쳤다.”
몸을 혹사시키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최동원 선수는 1988년 악의적인 트레이드를 당하게 되죠.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던 삼성라이온즈로 말입니다. 선수협의회를 만들려다가 구단의 앙심을 산 겁니다. 당시 최동원 선수는 “연봉이 낮은 동료들, 특히 연습생들의 복지가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며 선수협 결성을 주도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연봉을 받던 스타였기에, 이 같은 노력은 자신보다는 동료 선수들 그리고 야구의 미래를 먼저 생각해서였죠. 보복성 이적을 당한 최동원 선수는 결국 고향 구단에 돌아가지 못하고 2년 만에 은퇴를 합니다. 그로부터 21년 뒤 대장암이 재발해 숨을 거두죠.
◇지금도 가슴 치며 후회하는 일
“동원아, 지금 생각해도 엄마가 참 미안한 기 있다...”
엄마는 목이 멥니다. 최동원 선수가 유명을 달리하기 얼마 전 일입니다.
“제사 때문에 서울 너거 집에 갔을 때다. 니가 쇼파에 앉아 가지고 내 손을 잡아가 니 엉디 있는 데다 갖다 대믄서 ‘어무이, 여기가 아파요. 여기가 마이 아파요’ 했제…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여태까지 아무리 안 좋아도 그런 말은 엄마 걱정한다꼬 안 하던 아가 그러이까… 내가 그때 좀 더 따뜻하게, 진심으로 할 낀데 예사로 생각하고 부엌에 있는 메느리들이 안 듣구로 ‘엄마 손이 약손이다, 엄마 손이 약손이다. 빨리 아픈 거 없어지라’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기 지 쏙에 있는 말을 통 안 하는 아이가 얼마나 아팠으면 그 말을 내한테 했는가 싶어서 너무 가슴이 아파.”
엄마는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립니다. 병이 도진 걸 몰랐던 겁니다. 그만큼 주위에 걱정을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아들이었습니다. 2011년 7월, 바싹 야윈 모습으로 경남고와 군산상고 레전드 리매치전에 참석했을 때도 지인들과 언론에 “일부러 살을 뺐다”며 투병 사실을 숨겼죠. 그로부터 불과 두 달 뒤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사직구장(광장)에 있는 동원이 니 동상에 가 사람들이 없으면 궁딩이부터 만지는 기 그래서 그런 기라. ‘동원아, 엄마 손이 약손이다. 엄마 손이 약손이다. 이제는 안 아프제’ 하는 기다. 동상이니까 마 찹기는 찹아도 니 궁딩이를 쓰다듬고, 손을 잡고, 다리를 잡고 하면 뭣이 내 손으로 찌리하게 오는 거 같애.
얼마나 힘들었노, 내 아들. 동원아, 니 여기 엄마 가슴팍에 있제? 니는 내 심장이다. 내 심장이 뛰는 한은 아무리 생각을 안 할라꼬 해도 항상 (내 속에) 있어. 나하고 한 몸이 돼서 어데로 움직여도 함께 가거든. 길바닥에 적힌 11자(최동원 선수 등번호)만 봐도 쓰다듬는다 아이가.”
엄마가 사는 방이 한 칸 딸린 17평(56㎡) 아파트는 흡사 ‘최동원 박물관’ 같습니다. 방 한편 벽면을 채운 책장에는 아들이 받은 트로피며 메달, 입었던 유니폼, 사인볼, 기사를 스크랩한 파일, 팬들이 남기고 간 편지로 가득합니다. 침대에서 바로 보이는 자리입니다. 엄마는 눕거나 일어날 때조차 아들과 마주합니다.
“저기 사진으로 걸려있는 시아부지, 시어머이도 가시고, 남편도 먼저 갔지마는, 그분들 생각하면 이런 말을 내뱉기도 송구한 일이지만, 솔직하이 부모님이나 남편은 세월이 가면 조금씩 (슬픔이) 얕아져. 그런데 자식은 세월이 가도 그 가슴속에 묻어있는 기 절대 변하지 않을 거 같다. 왜? 내 속에서, 내 몸을 뚫고 나왔잖아. 문득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목이 메서 마 흐느껴진다. 동원아, 밤에 갑자기 엄마가 니(사직구장 광장의 기념동상)를 찾아가는 기는 그래서 그런 기다. 엄마 발이 절로 간다. 잘라고 누웠다가도, 복지관에서 봉사하고 집에 돌아가다가도, 나도 모르게 사직동으로 가는 기다. 그렇게 한 30분 니를 보면 거짓말처럼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엄마가 니 마음 몰라줘서 미안해
엄마는 6년 전인 2015년 사직구장에 선 적이 있습니다. 롯데자이언츠의 시구 요청을 몇 번 거절했다가 받아들여 선 마운드입니다. 사방을 돌며 관중에 정성스럽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엄마는 오른발로 탁탁 마운드를 골랐습니다. 오른손으로 로진백(송진 주머니)을 만진 다음 안경테를 고쳐 쓰고 모자의 챙도 바로잡은 뒤 공을 던지는 모습은 딱 최동원 선수였습니다.
“동원아, 니도 엄마 시구 봤나. 첨에는 극구 거절을 했다. 이 나이에 무슨 시구인가 싶어가. 근데 그 뒤에도 계속 연락이 오대. 밤에 누워 생각을 해 보이 내 아들이 오랫동안 그 자리서 공을 떤짔는데 그때 심정이 어땠을까, 나도 한번 거서 그 마음을 느끼 봐야 되겠다 싶드라.”
엄마는 최동원 선수의 투구 루틴도 연습을 했을까요.
“그거는 니가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봐가 내 가슴에 팍 박혀 있제. 대신 던지는 연습은 엄마가 쪼깨 했다. 요 옆 동 앞에 정구장이 있거든. 밝을 때는 (사람들이 다닐까 봐) 몬 하고 어듬사리질 때(어두워질 때) 집에 있는 헌 공을 두 개 들고 가서는 거리를 좀 두고 던지고 가서 줏어 오고 그래 연습을 했제. 던질 때마다 여남 번(10여회)씩 한 2, 3일 했을 끼다. 시구 날 마운드에 서가 열다섯 걸음 정도 앞으로 갔더니마 주심이 더 나오라카는 거를 엄마가 됐다 캤다. 연습을 할 때 그 정도 거리에서 했으니 마 내 있는 힘을 다해 떤짔지. 그때 느낀 거는 사방에 관중이 내 혼자만을 보고 있는데 그기 또 타자하고의 경쟁이다 아이가. 그 공 하나하나를 떤질 때마다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을꼬, 얼마나 힘이 들었겠노 싶드라고. 엄마는 그동안 남들이 ‘동원이 정말 잘했다’카면 마음이 좋기만 했구로. 니가 섰던 자리에 서 보니까 정~말로 책임감이 무겁고 힘든 자리드라. 동원아, 엄마가 그런 거를 몰라줘서 미안하다.”
엄마는 아직도 미안한 것 투성이입니다.
◇한 달 칩거한 엄마를 찾아온 아들
엄마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한 달을 집 밖에 내딛지 않은 때도 있었습니다.
“동원아, 그때 내한테 온 기 니 맞제? 니 가고 사람들이 위로한다꼬 말하는 것도 듣기 싫고, 세상 보기도 싫고, 항상 엎드리가 자고 눈 뜨고 했제. 그날도 엎드리가 있다가 눈을 감고 있었나, 살풋이 떴는가. 내 머리 우에서 니가 내를 딱 내려다보드라꼬. 근데 엄마를 보는 니 표정이 너~무 걱정스러운 기야.
일어나서 다시 보니까 아무것도 안 보였지마는 분~명히 니가 높은 데서 나를 내려다봤거든. 커서도 내한테 전화 걸어가 ‘어무이 어딥니꺼. 와 집에 계십니꺼. 친구도 만나고, 바람도 쐬세요’ 하던 기 생각나드라. 위에서 니가 가마이 보니까 엄마가 이래 집에 틀어박혀 있는 기 걱정스러워서 왔는갑다 싶었제. 그날로 ‘동원아, 엄마 기운 털고 나갈게’ 해서 (부산) 서구 종합사회복지관으로, 반송 종합사회복지관으로 봉사를 다녔다. 오늘도 오전에 7시 반에 나가가 (노인 대상 한글교육) 수업하고 왔다.
동원아, 틈날 때마다 엄마가 시도 쓰고, 편지도 쓰는 것처럼 엄마가 사랑하는 거 알제? 엄마는 항상 니를 생각하고 있다. 엄마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절~대 걱정하지 마라. 동원아, 내가 언젠가 눈을 감는다면 니하고 만나지 않겠나? 그때 다시 말할 끼구만, 내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맙고, 니 엄마로 살면서 참~말로 행복했다.”
한때 배구 코트 누빈 어머니… 새해 출간 계획도
고 최동원 선수의 모친 김정자(86)씨는 45년간 교단에 선 교사였다. 1999년 교감으로 정년 퇴임했다. 딸 넷에 아들 셋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사범학교까지 마친 거다. 여성은 아예 학교에 보내지 않는 일이 흔했던 1930~40년대에 말이다. “살다 어려움을 겪더라도 가계를 일으키려면 여자도 배워서 전문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부친의 신념 덕분이다.
배구 선수로 뛴 적도 있다. “나도 운동에는 관심이 있어서 배구를 좀 했어예. 교사 할 때도 전국교직원 배구대회에 부산 대표로 나가기도 했제. 동원이 아부지도 군에 있을 때 굉장히 날쌔게 축구를 했다대예. 그런 감각을 안 물려받았겠습니까.”
남편인 최윤식(2003년 위암으로 별세)씨와 데이트는 딱 한 번. 예비 시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그가 근무하던 학교로 몰래 찾아가 ‘선’을 본 뒤 추진된 결혼이었다. “우리 어머이가 ‘어떻드노’ 하시기에 ‘뭐 별 사람 있습니꺼’ 했는데 그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신 거제”라며 그는 웃었다. 결혼 전 데이트 때 다방을 처음 가 본 그는 뭘 시킬지 몰라 싱긋이 웃기만 했다고 한다. 예비 남편이 골라 준 메뉴는 홍차였다. 티백을 앞에 두고 한참 고민하다가 주머니를 반으로 갈라 물에 부었다. 홍차 이파리 가루가 둥둥 뜬 건 물론이다. ‘후후’ 불어 가며 마셔도 자꾸만 입으로 들어갔다. 한 모금 마시고 가루를 살짝 빼내기를 반복했다. “근데 (예비 남편이) 그래 마시면 안 된다고 말을 않데예. 나중에 메느리들한테 ‘그때 네 시어머이의 모습이 참 순수하고 예뻐 보였다’ 했다 카데예.”
최윤식씨는 대학 다닐 때 길에서 학도병으로 끌려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장교 출신이었다. 전쟁 때 발가락에 특발성 탈저(버거씨병ㆍ말초 동맥과 정맥에 염증을 일으키는 난치질환)를 얻어 대위로 전역했다. 나중엔 병이 심해져 결국 한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최동원 선수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어떻게 사냐”며 “죽겠다”는 남편을 붙잡고 그는 “내가 팔다리가 돼 주겠다”고 울며 매달렸다. 남편은 의족을 끼우고 걷는 연습을 지독하리만큼 열심히 했다. “죽을 때까지 지팡이 한번 짚지 않고 동원이 뒷바라지를 했다”고 김정자씨는 떠올렸다. 아내로서 가지는 후회는 이것. “생각해보니까 생전에 ‘여보’ 소리를 한 번도 몬 해봤데예.”
그는 ‘메모광’이기도 하다. 깨알 일기를 써 둔 가계부가 장에 그득하다. 최동원 선수와 관련된 일화를 틈틈이 적은 공책도 있다. 새해엔 그 메모들을 엮어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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