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선 헌법 해석 문제… 확립된 원칙 없어
영국선 수사권한법으로 엄격 시행 및 감독
편집자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간간이 조명될 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법조계. 철저히 베일에 싸인 그들만의 세상에는 속설과 관행도 무성합니다. ‘법조캐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국일보> 가 격주 월요일마다 그 이면을 뒤집어 보여 드립니다. 한국일보>
검찰이나 경찰 수사관이 요즘 압수수색 현장을 나갔을 때 상부에 가장 먼저 보고하는 것은 피의자의 휴대폰 관련 내용이다. 현대인들에게 휴대폰은 일상 그 자체이고, 그만큼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휴대폰 확보 유무가 수사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이 이런 ‘정보의 보고(寶庫)’인 휴대폰을 가만둘 리 없다.
이른바 ‘검언유착’ 의혹 사건의 피의자 한동훈 검사장의 비협조로 검찰 수사가 장기화하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지난달 12일 ‘휴대폰 잠금해제 강제 이행’을 위한 입법을 주문해 논란이 일었다. 한 검사장이 사용하고 있는 아이폰11의 잠금 상태를 해제하지 못한 탓에 검찰 수사가 지지부진하자, 아예 법적으로 수사 대상의 휴대폰을 열도록 강제하는 이른바 ‘한동훈 방지법’을 추진하겠다는 취지였다.
해외에서도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에 저장된 암호화 데이터에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려는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휴대폰 강제 열람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과 상충하는 측면이 있어 각국 정부도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아이폰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휴대폰, 특히 아이폰 잠금해제와 관련한 판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신법(新法)을 만들기보단, 연방헌법에 대한 판례 변경을 통해 새로운 정보기술(IT)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이다. 미국 사법체계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휴대폰 잠금해제를 위한 비밀번호 제공 강제는 곧, 미 수정헌법 5조의 해석 문제로 이어진다. ‘누구도 형사상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한 수정헌법 5조는 ‘자기부죄금지의 원칙’으로도 불린다. 이에 따라 암호화된 데이터를 풀기 위한 비밀번호를 알리는 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는 것인지가 쟁점이 된다.
미 연방대법원은 △수사기관으로부터 사법적으로 협조를 강제당했는지 △강요된 행동을 ‘진술’로 볼 수 있는지 △강요된 진술이 형사상 자신에게 불리한지 등을 따져 자기부죄금지의 원칙 적용 여부를 판단한다. 강요된 행동 또는 진술을 이미 수사기관이 알고 있는 경우엔 해당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건별로 유형이 다르고, 각 주(州)별로도 다른 법 적용이 이뤄지고 있어 ‘확립된 원칙’이란 없는 게 현실이다.
영국의 경우, 수사권한법(Investigatory Powers Act)을 제정해 운영 중이다. 진술거부권을 우회할 수 있는 일종의 제출 명령을 명문화했는데, 이를 거부했을 땐 범죄유형별로 달리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아동음란물 사건, 테러 등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는 사건에선 가중처벌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수사권한을 감독하는 기관을 두고 매년 국무총리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네덜란드도 관련 법령을 제정, 경찰이 압수수색이나 임의제출로 확보한 자료에서 암호화된 정보가 발견되면 암호를 풀도록 명령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암호화된 통신 내용을 감청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명령에 불응할 땐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는 등 고의가 아닌 경우 △고의인 경우로 각각 나누고, 고의에 해당할 땐 최대 4배까지 가중처벌한다.
이밖에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프랑스, 아일랜드 등에서도 진술거부권을 우회할 수 있는 법령을 만들어 범죄 수사에 활용하고 있다.
과학수사 부서에서 근무했던 차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날이 갈수록 과학통신기술이 발달하고 있어서 수사 기법도 이를 따라가고 있지만, 아무래도 피의자 등 사람이 직접 수사에 협조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수사기관이 암호화됐던 정보를 확보한 뒤 이를 누설했을 땐 엄중하게 처벌하는 등 심층적인 검토와 논의를 거쳐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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