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두 번째 도시인 동부자바주(州) 수라바야 도심엔 한글이 적힌 탑이 하나 서 있다. 탑이 있는 공원 이름마저 '타만 코레아(한국 공원)'이다. 지난해 9월 공원을 찾았을 때 연못에 물고기들이 노닐 정도로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 다만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탑은 이곳 저곳 틈이 벌어지고 상처가 나 있었다.
'평화 기원의 탑'은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자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 12월 세웠다. 일제강점기에 머나먼 적도의 나라까지 끌려와 고초를 겪고 희생된 우리 조상 2,000여명의 넋을 기릴 목적이었으나 끝내 탑 이름에는 ‘추모’라는 글자를 새기지 못했다. 한글 석판에는 강제징용과 추모라는 탑 건립의 목적을 제대로 담았으나 영어와 인도네시아어 석판에는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는 식의 설명만 달렸다.
탑의 본디 목적과 동떨어진 이름, 언어마다 다른 기술은 일본의 압력 탓이다. 당시 일본 영사관은 탑 건립을 막기 위해 물밑에서 수라바야 지방 정부를 압박했고, 탑 이름과 설명 문구까지 간섭하고 제동을 걸었다는 후문이다. 난처해진 인도네시아가 한국과 일본의 입장을 절충한 흔적을 탑에 아로새긴 셈이다. 현장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다행히 연말까지 탑을 보수한다는 얘기나마 위안을 얻고 현장을 떠났다. 1년이 넘도록 완공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공사 지연은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보수를 마치고도 정작 세상에 알리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번에 탑 아래 새로 설치한 푯돌 마무리 작업을 못 해서다. 이경윤 동부자바한인회장은 "보수비용을 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명칭을 푯돌에 새기는 게 당연한데 일본 쪽에서 '강제동원피해자'란 단어를 빼라고 로비하고 있다"고 했다.
비슷한 이유로 자카르타에 있는 독도 벽화에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글귀를 쓰지 못했다. 관심이 집중된 소녀상은 그나마 낫다. 벌써 광복 75주년이지만 일본의 간섭은 5,000㎞나 떨어진 이 적도의 땅에서 은밀하고 집요하게 이뤄지고 있다. 답답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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