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난 어느 오후, 우리는 자판기 커피를 손에 들고 할 일 없이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졸업하면 뭐 먹고 살래? 달달한 커피를 다 비우고 쓴 입맛만 홀짝일 때 쯤 졸업 이후가 화제로 떠올랐다.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난 선생은 죽어도 안 한다. 20대 초반의 나는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호기롭게 떠벌렸다. 이런 저런 실없는 농담이 오갔다. 그러다 학문하는 자의 태도를 가리키는 세 가지 사자성어가 화제로 떠올랐다. 모름지기 학문한다는 자들이 마음에 새기고 행해야 할 것들이 있지. 그게 뭔데?
첫 번째는 아전인수. 우리는 낄낄대며 맞는 말이라고 박수를 쳤다. 그럼 두 번째는? 곡학아세. 그렇지, 그렇지. 좀 배웠으면 이제 곡학아세 좀 해 줘야지. 그럼, 세 번째는? 마지막 세 번째는 그게 뭐냐하면 말이지, 망망대해. 망망대해? 응. 맞네. 과제로 보고서 써야 하는데 정말 망망대해다. 아니야, 차라리 망연자실이 낫지. 우리는 계속해서 낄낄거렸다.
시간이 흘러 나는 장담과 달리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아전인수, 곡학아세, 망망대해라는 세 꼭짓점으로 이어진 버뮤다 삼각지대에 갇혀 살고 있다. 그래도 가끔 그 때의 말장난을 즐겁게 떠올린다. 대체 우리는 뭐가 그렇게 즐거웠을까? 그날의 우리는 보고서 쓰기는 싫었고 강의는 어려웠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뭘 어떻게 살아야할지 몰라 그저 막막했다. 그 막막한 시간들을 잠시나마 말장난으로 잊을 수 있어서 나는 그 순간이 행복했을까.
말장난은 즐겁다. 무엇보다 손에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놀이다. 말로 하는 여러 놀이가 있지만 그중 인기가 많은 것은 글자 네 개로 하는 놀이일 것이다. 중국의 옛이야기를 담은 고사성어나 사자성어가 아닐지라도, 심지어 한자가 아니라도 된다. 말을 가지고 놀려면 글자 네 개면 충분하다. 아이들이 레고 조각을 엉뚱하게 끼워 맞춰 새롭고 놀라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는 글자 네 개를 온갖 방식으로 조합해 세상의 단편들을 기민하게 짚어 내거나,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본래적 의미의 사자성어가 아니라도 필요하면 한자, 한글, 외래어 이것저것 막 가져다 신조어를 만든다. 이러한 ‘유사 사자성어’로는 일 하지 않는 공무원을 비꼬는 ‘복지부동’,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내로남불’, 최근에 등장해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등등이 있다.
사자성어에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사자성어의 사용은 구구절절한 설명을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복잡한 상황에서 누군가 사자성어를 내어 놓을 때, 그가 원하는 건 이런 것이다. 이거 봐봐. 이제 뭔 말인지 알겠지? 응 뭔 말인지 알겠어.
제대로 작동하기만 하면 높은 효율을 보여주는 이런 특징 때문인지, 중국의 담화 공동체에서는 사자성어를 의사소통 도구로 높이 평가한다. 우리의 논술문에 해당하는 중국의 의론문에서 사자성어나 속담, 고전을 인용해야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그 예이다.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같은 한자 문화권인 한국에서도 사자성어의 몸값이 치솟을 때가 있다. 바로 연말연시이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쯤이면 교수들이 뽑았다는 ‘올해의 사자성어’가 발표된다. 1월이 되면 각 기관의 수장들이 한 해를 시작하는 각오를 낯선 사자성어로 표현한다. 앞서 사자성어가 매우 효율적인 의사소통 도구라고 했지만, 연말연시에 발표되는 사자성어는 다르다. 여기서는 소통의 비효율성, 다시 말해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게 핵심이다. 사자성어의 발표와 함께 상세한 해설이 따라 붙는 이유이다. 소통은 중요하지 않다. 누가 말할 자격이 있는가, 누가 설명할 자격이 있는가를 공표하는 게 중요하다. 아무나 새해 각오를 말하며 사자성어를 쓸 수 없으니까. 이때의 사자성어는 상징적 자본이자, 지배계급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이 의례의 작동방식은 이거다. 이거 봐봐.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응 모르겠어. 잘됐네. 그러니까 나 좀 우러러봐라.
‘문자를 쓴다’고 할 때, 우리는 이 ‘문자’가 한자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문자 좀 쓰는’ 이들은 왜 한자성어로 저물어가는 일 년을 정리하고, 새해의 기대를 나타내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의 일부를 언어적 근대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김병문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근대 이전 동아시아의 전통적 관점에서는 문자는 세계의 구성 원리이자 규범인 ‘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자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한자학의 대가 시라카와 시즈카는 고대 사회에서 문자가 신과 소통하는 수단이었다고 말한다. 한자는 세계의 이치가 깃든 것이며 따라서 신화와 종교의 세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언어적 근대를 쟁취하기 위한 주요 전략은 문자에서 신화를 걷어내는 것, 문자 자체에 별 의미가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김병문, ‘국어의 사상’을 넘어선다는 것에 대하여)
연말연시는 우리의 일상이 잠시 신화적 시공간으로 변모하는 때이다. 그러니 신화와 종교의 세계에 속한 한자성어를 사용해 이 시간을 기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기에 사자성어가 유통되고 소비되는 모습이 내게는 일종의 전근대로의 퇴행처럼 보인다.
얼마 전 2020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가 선정되었다. 이 말이 과연 2020년의 사회상을 대표할 수 있는 말인지는 따지지 않기로 하자. 내가 흥미를 가지는 부분은 소위 ‘올해의 사자성어’라는 이름으로 매해 행해지는 사자성어의 선정과 유통, 소비 과정이다.
이 과정은 신전에서 성스러운 선지자들이 지혜의 말인 신탁을 받아오는 과정과 닮아있다.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선지자들은 신탁을 통해 자신들의 권능을 내보이는데, 이를 위해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신령한 문자인 한자를 이용한다. 멀쩡히 사용되는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한자를 억지로 엮은 ‘아시타비’라는 말로 바꾼 것도 이를 위해서다. 그러나 이 말의 선정은 자신들을 선지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의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 말은 세상을 움직이지도, 세상을 날카롭게 비춰 보여주지도 못한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학문하는 이들은 본래 뭘 모르는 사람들,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연구를 통해 가까스로 겨우 알아가는 것, 이것이 학문하는 이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니 이런 어리석은 자들에게 세상을 아냐고 제발 물어보지 마시기 바란다.
연말연시 문자 좀 쓰는 이들이 내놓은 ‘글자 네 개’ 안에 세상은 없다. 세상은 그런 고상한 문자가 아닌, 우리가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는 고통의 말들 속에 있다. 그리고 그 고통에 감응하는 이들의 말들 속에 있다. 일터에서 죽지 않게 해달라는 말 속에 있다. 여자이기 때문에, 장애인이기 때문에,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지방에 살기 때문에, 그 밖의 온갖 이유 때문에 차별받지 않게 해달라는 말 속에 있다. 세상은, 비닐하우스에서 잠자다가 얼어 죽지 않게 해달라는 말 속에 있다.
그 말들은 글자 네 개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럴 리 없고, 그럴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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