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죄 적용 아동학대 사망 사건 5건 판결문 분석]
상습 폭행에 아이 목숨 위험해도 방치, 더 때리기도
가해 부모의 '미필적 고의' 증명할 증거 확보가 핵심
'원주 3남매 사건'선 입증 부족 이유로 "살인죄 무죄"
‘정인이 사건(입양아 학대 사망사건)’의 첫 재판을 앞두고 가해자인 양부모를 살인죄로 엄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실제로 ‘울산 계모 사건’을 계기로 아동학대 사망사건에서 살인죄를 적용하는 경우도 점차 늘고 있고, 학대 부모에게 징역 20년 안팎의 중형이 선고된 사례도 적지 않다. 다만 구체적인 학대 정황에 따라 법원의 유무죄 판단은 엇갈렸다. 따라서 결국 관건은 향후 검찰이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입증할 증거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느냐다.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달 검찰은 정인이 양모를 아동학대치사 혐의로, 양부를 아동 유기ㆍ방임 등 혐의로 각각 재판에 넘겼다. 두 사람에 대해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공분이 일고 있는 것은 선고 형량 때문이다. 대법원 양형기준상 아동학대치사죄는 기본 형량범위가 징역 4~7년인 반면, 살인죄는 징역 10-16년으로 차이가 꽤 크다.
사법기관은 통상 학대 피해 아동이 숨질 경우, 가해 부모에게 상해치사죄나 학대치사죄를 적용해왔다. 학대는 가정에서 은밀히 이뤄지고, 피해를 증언할 아이는 이미 세상을 떠난 데다, 일반 살인사건과는 달리 흉기가 없는 경우도 많아 ‘살인의 고의’를 법정에서 입증하는 게 좀처럼 쉽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가해 부모가 ‘때리긴 했어도 죽일 의도는 없었다’며 발뺌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살인죄가 인정되려면 최소한 가해자가 ‘이렇게 하면 애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인식하면서도 계속 학대 행위를 했다는 게 증명돼야 한다.
"성인의 주먹은 흉기"... 울산계모 사건, 살인죄 첫 적용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 인정된 대표적 사례는 ‘울산 계모 사건’이다. 계모 박모씨는 2013년 10월 “소풍 가고 싶다”는 7세 의붓딸을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당초 1심 재판부는 “중형이 마땅하다”면서 징역 15년을 선고하면서도, 살인 혐의는 무죄로 판단했다. 박씨가 의붓딸을 지속적으로 폭행해 온 사실에 비춰 사망 당일 갑자기 살인 고의가 생겼다고 보기 어렵고, 흉기가 아닌 손과 발로 폭행했으며, 발로 때릴 때 아이 머리는 피했다는 점 등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2심인 부산고법에선 살인죄가 인정돼 징역 18년이 선고됐다. 맨손ㆍ맨발에 의한 아동 학대 사건에서 살인의 고의를 처음으로 인정한, 기념비적인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7세 아동에게 성인의 주먹과 발은 흉기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또, 박씨가 폭행 당시를 회상하며 “의붓딸이 비명을 지르고,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고 진술한 부분도 ‘아이의 생명에 심각한 지장이 있음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정황’이라고 판단했다.
3개월간 화장실 감금한 '원영이 사건'서도 살인죄 인정
이른바 ‘원영이 사건’의 계모와 친부도 살인 혐의가 인정돼 각각 징역 27년과 17년이 확정됐다. 계모 김씨는 6세 원영이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2015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 사망 당일까지, 화장실에 감금해 하루 한두 끼만 주면서 상습 폭행했다. 친부는 이를 방치했다. 1심 재판부는 △지속적 학대를 당한 원영이가 영양실조로 기아(饑餓) 상태였던 점 △속옷 차림의 아이에게 찬물을 뿌리고 난방이 안 되는 화장실에 방치할 경우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었던 점 등을 들어 ‘살인의 고의’를 인정하면서 김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2심에선 7년의 형량이 늘었고, 대법원도 이대로 확정 판결을 내렸다.
살인죄를 인정한 아동학대 사망사건 하급심 판결들은 지난해에도 나왔다. 5세 의붓아들을 목검 등으로 상습 폭행한 끝에 숨지게 만든 20대 계부 이모씨는 지난달 서울고법에서 1심보다도 형량이 높아진 징역 25년을 선고받았다. 2심 재판부는 “피해 아동의 신체 거의 모든 부위에 문제가 생긴 게 눈으로도 확인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씨는 (사망 전날) 아이를 치료하긴커녕 다시 방바닥에 집어던지며 폭행하고, 팔다리를 몸 뒤쪽으로 묶어 몇 시간 동안 방치했다”며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봤다.
작년 6월 여행용 가방에 왜소한 체격의 9세 의붓아들을 7시간 이상 가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에서도 살인죄가 인정됐다. 계모 성모씨 측은 재판 과정에서 “수시로 아이 상태를 확인했고, 가방을 연 후에는 아이에게 즉시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며 살인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심은 성씨가 △아이를 가방에 가둬둔 채 3시간 동안 외출한 점 △자신은 물론, 친자녀들도 동원해 가방 위에서 뛰었던 점 등을 들어 징역 22년을 선고했다.
'고의 입증' 증거 필요... 檢, 부검의 3명에 재감정 의뢰
아동학대 사망사건과 관련, 법원은 이처럼 △폭행ㆍ학대의 빈도와 강도 △사망 직전 아동의 건강 상태 △폭행 이후 방치 또는 추가 학대 여부 등 전후 사정을 고려해 가해 부모의 ‘살인 고의’ 유무를 판단해 왔다. 이번 사건에서도 양모 등이 ‘정인이가 숨질 수 있을 정도’라는 걸 알면서도 폭행을 계속 가했다거나, 학대 후 아이 상태가 심각한데도 치료 없이 방치한 사실 등이 밝혀져야만 살인죄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에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명숙 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 변호사는 “사진과 병원 기록, 학대 신고자인 교사ㆍ의사 등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증거로 삼으면 충분히 살인의 고의 입증이 가능해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도 4일 “언론에 보도된 피해 사실, 현출된 증거자료만 봐도 살인죄로 의율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성명을 냈다.
피해자가 성인인 다른 살인 사건 판례를 참고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성인 여성을 췌장이 파열될 정도로 때려 숨지게 한 ‘제주 여교사 살인 사건’ 판결에서도 미필적 고의가 인정됐다”며 “정인이 사건 역시 양모가 실수로 떨어뜨린 게 아니라, 외부 충격으로 췌장이 파열된 걸 입증하면 유약한 아동이 피해자라는 걸 고려해 미필적 고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사건 발생 당시 양모의 위력 행사 등을 뒷받침할 증거를 수사기관이 추가 확보해야 한다는 게 과제다. 20대 친부가 첫 돌도 지나지 않은 자녀 2명을 질식시켜 숨지게 한 ‘원주 3남매’ 사건처럼, 살인죄로 기소했다가 입증 부족으로 무죄 판결이 나온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정인이는 등 쪽에 가해진 강한 충격으로 복부 손상을 입고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지만, 충격 발생 경위는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서울남부지검은 “정인이의 사망 원인과 부상 정도를 살펴봐 달라”며 부검의 3명에게 재감정을 의뢰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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