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서민들에게 도시는 살기도(live), 사기도(buy) 어려운 곳이 되고 있습니다. 부동산은 치솟고 거주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집니다. 이런 불평등과 모순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도시 전문가의 눈으로 도시를 둘러싼 여러 이슈를 하나씩 짚어보려 합니다. 주택과 부동산 정책, 도시계획을 전공한 김진유 경기대 교수가 <한국일보> 에 3주에 한 번씩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14> 후분양은 좋은 대안, 그러나 최선은 아니다
아무리 언택트가 대세라지만 전 재산이 걸린 집을 살 때는 보고 사야 마땅하다. 그러니 지어지지도 않은 집을 견본주택만 보고 사는 것은 일반적 상식으로는 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1970년대 후반 등장한 선분양은 여전히 시장을 압도하고 있다. 수십 년간 선분양의 문제점이 성토돼 왔고 두 차례 강력한 후분양 활성화 정책이 추진됐지만 선분양은 철옹성이다. 왜 그럴까. 선분양의 역사와 존재이유, 해외의 선분양 제도를 살펴보면서 그 답을 찾아보자.
선분양은 왜 여전히 대세인가
우리나라에서 선분양(Presale)이 시작된 것은 1978년 5월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이 제정되면서부터다. 당시에는 전체 건축공정 중 20% 이상 공사가 진행됐을 때 분양이 가능했으나 지금은 사업자가 대지소유권을 확보하고 보증기관으로부터 분양보증을 받은 경우 착공과 동시에 분양할 수 있다. 물론 현 제도하에서도 사업자는 자유롭게 후분양을 선택할 수 있다. 관련 규정에는 선분양을 ‘해야 한다’고 강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업자는 선분양요건을 갖추더라도 원한다면 일정 공정이 완료된 후 분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시장에서는 왜 선분양이 대세일까. 수요가 넘치는 상황에서 주택공급업자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분양시기를 결정하기 때문일까.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분양시장 참여자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측면이 더 강하다.
우선 정부는 신속한 주택공급 효과를 보기 위해 후분양보다는 선분양을 선호해왔다. 선분양을 통해 미리 계약자를 선정하면 시장 안정효과를 조기에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주택자들이 일단 수분양자가 되면 추가적인 주택수요를 일으키지는 않으므로 하루라도 빨리 분양하는 것이 정책당국자에게 유리하다. 2003년에 이어 2018년에 다시 후분양제 의무화를 추진하겠다고 공표했음에도 정부 스스로 3기 신도시에 대해 사전청약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공급자 입장에서도 선분양이 유리하다. 분양수입을 통해 건설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분양제도는 중소업체들이 공격적으로 아파트사업을 할 수 있는 가장 큰 디딤돌이다. 다수의 전문가들이 우려하듯 후분양이 의무화되면 분양대금에 의존하던 사업자들 중 중소업체는 사업을 포기할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수분양자 입장에서도 선분양이 유리한 선택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분양 가격이 입주시점의 가격보다 저렴한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수분양자에게는 매력적인 방식이었다. 제도가 미비했던 과거에는 사업자의 도산, 심각한 하자, 입주 지연 등으로 큰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지금은 분양보증과 하자보수보증을 통해 상당부분 위험요소도 제거됐다. 분양보증 심사 과정에서 분양가도 통제하므로 분양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선분양이야말로 저렴한 가격으로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선분양, 무엇이 문제인가
선분양에 대해 소비자 선택권 제한, 공급자 위험의 소비자 전가, 부실시공, 입주 지연, 불법 전매, 로또 아파트 등 매우 다양한 문제점이 지적돼왔다. 본질적으로 모두 개선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후분양을 하면 선분양에서 발생하는 소비자 선택권 제한은 일부 해소될 것이다. 선분양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학교나 지하철역 신설 여부, 해당 호에서의 조망이나 일조 확보 여부 등을 조금 더 명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 준공 후 분양이 아닌 60~80% 공사 후 분양이라면 아파트 내부의 인테리어나 부실시공 여부를 소비자가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공정상 수분양자 결정 전에 발코니 확장이나 시스템에어컨 등의 옵션을 선택해야 할 수도 있어서 오히려 소비자 선택권이 제한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공급자 위험의 소비자 전가 문제, 부실시공과 입주 지연은 분양보증과 하자보수 의무화 등으로 이미 상당부분 해소됐다. 특히 하자는 후분양 의무화로 해소될 문제라기 보다는 공사 감독과 감리의 문제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후분양 경험이 있는 현장 전문가들에 따르면 후분양 단지의 하자발생율이 선분양단지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불법전매의 주범은 분양가 통제이며, 선분양제는 종범에 불과하다. 프리미엄은 시세와 분양가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므로 후분양을 한다 해도 두 가격의 차이가 크다면 단기 시세차익을 실현하려는 소위 투기꾼들의 활동은 여전할 것이다. 분양권을 사고 파는가 아니면 실제 주택을 사고 파는가만 다를 뿐 돈을 번다는 사실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해외 선진국의 선분양, 그들의 존재 이유
주택시장 선진국에서도 원활한 사업추진과 소비자 선택권 확대를 위해 사전판매제가 활용되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프리세일(Presale)이라고 부르며 영국에서는 오프플랜(Off-Plan), 호주에서는 오프더플랜(Off-the-Plan)이라고 부른다. 주로 건설업자가 사전판매계약을 통해 주택수요를 증명하고 이를 기반으로 금융기관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한다. 사전 계약률이 높을수록 이자율도 낮아지므로 사업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중도금이 없고 입주 시에 잔금을 납부한다는 점, 사인(私人)간의 계약으로 보아 계약금에 대한 보험을 개인이 들어야 한다는 점, 분양가를 통제하지 않으므로 전매에 대해서도 공적인 제약이 없다는 점 등은 우리와 다르다.
싱가폴 주택청(HDB)에서 사용하는 주택공급 방식 중 BTO(Build to Order) 방식은 우리의 사전청약과 유사하다. 몇 개의 대상지에 대해 입주자를 모집한 후 추첨을 통해 사전계약자를 선정하고 계약률이 일정수준 이상이 되면 비로소 주택건설을 시작한다. 사전계약, 일종의 선분양을 통해 수요를 확인한 후 수요가 충분한 부지에 대해서만 주택건설을 진행하는 것이다. BTO 방식에서도 역시 선분양은 수요를 확인하는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
홍콩에서는 1954년 처음으로 미완성 주택을 판매한 이래 선분양이 반세기 넘도록 중요한 분양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홍콩의 선분양 방식은 우리와 유사하다. 예를 들면, 개발업자는 프로젝트 수행능력을 은행연합체로부터 인증 받고 토지부의 승인을 받아야 선분양 할 수 있으며, 준공 전 분양권 전매를 금지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90년 중반 이후 선분양이 대체로 50% 이상을 차지해 후분양보다 많았으며, 2013년에는 선분양 비율이 83%에 이를 만큼 압도적이었다.
선분양과 후분양의 조화가 답이다
후분양 활성화는 필요하지만 의무화하는 것은 최선이 아니다. 대만, 중국 등 우리 주변의 국가뿐 아니라 주택금융이 발달하고 주택시장이 성숙한 서구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선분양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택부족이 심각하고 주택금융이 미비했던 시절 신속한 주택공급확대를 위해 선분양을 선택했다고 알고 있지만, 틀렸을 수도 있다. 해외의 사례를 보면 선분양은 후분양과 함께 공급자와 수요자에게 좀더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의 선분양제도와 분양보증제도, 하자보수보증제도 등은 거의 반세기 동안 시행착오를 통해 다듬어온 한국형 공동주택 분양시스템이다. 최근 주택도시보증공사가 분양보증제도를 카자흐스탄에 수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우리나라의 주택대량공급 시스템을 배우고자 한다. 그 핵심 중 하나가 선분양시스템이다. 전면적인 후분양 의무화를 추진하기 보다는 주택의 품질향상과 소비자 선택의 폭을 확대하는 유연한 분양시스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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