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 위엄 과시...조선왕실 문서 중 최대 규모
조선 숙종 시기, 서인과 남인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정국과 이를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당시 왕실의 상황을 보여주는 귀한 문서가 국보로 승격된다. 조선왕실 문서 중 최대 규모인, 공신들의 충성 맹세를 기록한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바로 그 대상이다.
7일 문화재청은 현재 보물로 지정된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해당 문서는 숙종 6년(1680년) 8월 30일에 열린 회맹제(會盟祭)를 기념하기 위해 14년 뒤인 1694년에 제작됐다. 회맹제란 왕이 공신들과 함께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단결을 맹세하던 의식을 말한다.
문서는 1680년 거행된 회맹제의 회맹문(종묘사직에 고하는 제문)과 보사공신(1680년 경신환국 때 공을 세운 이들에게 내린 훈호) 등 역대 공신 및 그 후손의 명단을 기록한 회맹록, 종묘에 올리는 축문과 제문을 담고 있다.
400명이 넘는 회맹제 참석대상을 다 기록하다보니, 그 규모는 왕실 문서 중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정도로 거대하다. 가로가 25m, 세로가 88.8㎝에 달한다. 박수희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연구관은 “길이도 길이지만 폭도 굉장히 큰 편”이라며 “회맹제 자체가 충성 맹세 자리다 보니, 그 기록 또한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려는 듯 크고 화려하게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회맹축은 공신의 지위가 부여되고 박탈되고 회복되는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회맹제는 경신환국이 있었던 1680년에 열렸는데, 이 회맹제를 기념하는 문서는 갑술환국이 벌어진 1694년에 제작된다. 서인은 경신환국을 계기로 집권해 공신(보사공신)이 되었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공신 지위가 박탈됐고, 이후 갑술환국으로 다시 집권하면서 공신 지위를 회복한다. 왕권을 강화하려던 숙종이 권력을 쥔 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권력을 빼앗고 그 당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형태와 형식면에서도 완벽하다는 평을 받는다. 조밀하게 짠 옅은 황비단 위에 붉은 선을 가로 세로로 치고, 그 안에 글씨가 단정하게 적혀 있다. 긴 문서의 양 끝엔 붉은색과 파란색 비단을 덧댔고, 위ㆍ아래에는 옥으로 장식한 축이 있다. 축의 말미에 제작 사유와 제작 연대가 적혀 있고, 국새를 마지막으로 찍어 왕실 문서로서의 완전한 형식을 갖췄다.
지금까지 문헌을 통해 전래가 확인된 회맹축은 총 3건이다. 하지만 인조 때 제작 된 이십공신회맹축-영국공신녹훈후는 국새가 날이 돼 있지 않고, 영조 때 만들어진 20공신회맹축은 실물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형식상, 내용상 완전한 형태로 전래된 회맹축은 ‘20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가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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