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가 망하자 조선은 청나라를 탓하며 원수로 여겼지만, 앞뒤 정황을 보면 명나라는 자멸했다고 할 수 있다. 명나라 말기는 사회 곳곳이 방탕과 부패로 곪아터졌고 마지막 황제 숭정(崇禎, 재위1628~1644)은 대외 군사 전략도 국내 현안에 대한 정치력도 전무한 인물이었다.
1644년 3월 19일 이자성(李自成)의 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숭정제는 목을 매어 자결한다. 명나라는 사실상 이때 망한 것이다. 산해관(山海關)에서 청나라와 대치하던 오삼계(吳三桂)는 이자성을 토벌하겠다며 청군에 원병을 요청한다. '인의(仁義)의 군사로 역적을 토벌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장성을 넘어 온 청나라는 반란군을 격파하고 북경에 도착한다. 숭정제가 자살한 지 두 달도 채 안된 5월 2일이었다. 그들은 숭정제를 '사종(思宗)'이라고 받들면서 성대한 장례를 치른다. 오랑캐가 '인의'로 중화를 위해 복수를 해 준 셈이다. 중화사상에 젖은 당시 지식인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말세였다.
물론, 청나라가 북경에 눌러 앉자 반청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명나라 부흥운동은 '한심(寒心)' 그 자체로, 망명정권 안에서도 감투싸움과 파벌싸움을 반복할 뿐이었다. 대만의 정성공(鄭成功) 말고는 주목할 인물이 없다. 결국 자멸한 것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한편, 망국이라는 믿을 수 없는 사태 앞에 사대부 계층은 요동쳤고 온갖 반응과 분석이 쏟아졌다. 대부분 '오랑캐' 타령을 하며 분기탱천 했지만, 소수의 몇 사람은 더 높은 시점에서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청초삼대가(淸初三大家)'라고 부르는 고염무(顧炎武, 1613~1682), 황종희(黃宗羲, 1610~1695), 왕부지(王夫之, 1619~1692)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반청운동에 가담했으나 망명정권의 행태를 보고 대세가 이미 틀어졌음을 인식한다. 은거한 뒤로는 청나라의 집요한 회유에도 끝까지 벼슬을 거부하고 저술에 몰두하며 명나라 멸망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것으로 소명을 마치고자 했다. 그래서인지 고염무가 '일지록(日知錄)'에서 보여 준 '망국(亡國)'과 '망천하(亡天下)'에 대한 식견은 주목할 만하다.
"'망국'과 '망천하'는 어떻게 다른가? 임금의 성(姓)이 바뀌고 나라 이름이 바뀌는 것을 '망국'이라 하고, 양심이 사라지고 민중을 착취하고 사람끼리 잡아먹는 상황을 '망천하'라 한다. 그러므로 천하를 보전할 줄 알아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 나라를 보전하는 일은 왕후장상들이 생각할 일이지만 천하를 보전하는 일은 미천한 필부에게 책임이 있다.(保國者, 其君其臣肉食者謀之. 保天下者, 匹夫之賤與有責焉耳矣.)"
풀어 보면, '망국'은 정권 교체이고, '망천하'는 윤리와 도덕의 상실을 가리킨다. 고염무의 논리라면, 왕씨 고려가 이씨 조선이 되더라도 세상이 망했다고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어떤 왕조의 '망국'이고, 집권세력의 문제이다. 백성은 책임도 관계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 윤리나 염치가 없어지면, 이는 천하, 즉 인간세계가 망함을 뜻한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는 필부들이 책임져야 하고, 옥좌는 임금 노릇 하고 싶은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 정말 소중히 지켜할 것은 인간의 세상이고, 그것은 평민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천지가 개벽할 소리였다.
세월이 흘러 청나라도 무너졌다. 제 가족과 제 나라를 팔아넘기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천하가 망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탄식했다.
"수천 년 문명과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인이 짐승과 같은 지경이 되었으니 누구의 치욕인가… 지금 나라의 치욕을 씻고자 한다면 우리부터 새로워져야 한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모든 사람이 새로워지려면 어찌 해야 하는가. 나 자신부터 시작하면 된다. 이것이 고염무가 말한 천하의 흥망이 필부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의 참 뜻이다.(天下興亡, 匹夫有責也. 출전 '음빙실합집(??室合集)')"
고염무의 생각을 양계초가 압축한 '천하흥망(天下興亡), 필부유책(匹夫有責)'은 중국 사회에 큰 공명을 일으키며 하나의 성어로 자리 잡았다. 세월이 흐른다 해도 누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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