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즉각 자유케 하는 건 진리보다 권력이다. 그래서 약자들은 약자의 대표를 국회로 보낸다. 노동자는 노동자를, 흑인은 흑인을, 여성은 여성을. 남인순의 ‘더불어민주당 3선 국회의원 배지’는 여성의 정치 참여를 지지한 모두의 것이다. 여성 운동 오래 한 대가로 받은 개인 공로상이 아니다. 과거 여성들의 분투, 미래 여성들의 열망이 법제도로써 쟁취한 것이다.
남 의원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끈끈한 동지였다. 지난해 박 전 시장이 비서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것을 시장 젠더특보 임모씨에게 유출한 사람으로 검찰은 남 의원을 지목했다. 그는 피소 사실을 몰랐으므로 유출할 수 없었다고 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부인했다. “박 시장 관련 불미스러운 얘기가 도는데 무슨 일인가”라고 물었을뿐이니 죄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그 질문으로 남 의원은 이미 무고하지 않다. 1분에서 2분. 피소 사실이든, 돌아다닌 소문이든, 남 의원이 여성단체에서 전해 듣고 임씨에게 전화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남 의원은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임씨를 거쳐 박 전 시장 귀에 들어가면 피해자가 얼마나 위험해질 것인가에 무신경했다.
궁금하면 불쑥 질문할 수 있는 건 대단한 권력이다. 남 의원이 함부로 건 전화 한 통은 피해자를 해쳤다. 성추행 사건은 은밀히 해결될 가능성을 잃었고, 피해자는 일상을 잃었다. 가해자 사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은 영원히 사과받을 수 없음, 끝내 단죄할 길 없음으로 귀결됐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고발은 일생을 거는 일이다. 그걸 “불미스러운 얘기”라고 공연히 부름으로써 남 의원은 자신의 걱정이 여전히 누구를 향해 있는가를, 스스로를 누구와 동일시하는가를 들키고 말았다. 다급할 때 튀어나오는 게 본심이라던가. 약속한 많은 것을 남 의원은 배반했다.
“남인순이 그랬을 리 없다”고 아무도 그를 두둔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여성들의 연대가 틈을 보이자 어김없이 어른거리는 것은 차별과 혐오다. “너희가 고작 그 수준이지.” “너희 따위가 감히 정치를.”
가장 수구적인 세력이 가장 노골적으로 남 의원을 조롱한다. 그를 제물 삼아 여성 운동을 신나게 후려갈긴다. 남인순이 상징하는 ‘가치’를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을 묵인하고 피해자를 헐뜯은 성폭력 공범들은 어느새 안전해졌다. 민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무공천 약속을 뒤집은 사실도 지워졌다.
이 모든 퇴행과 참혹에 남 의원은 거리를 둔 채 침묵하고 있다. 11일 의정활동보고서를 내고 “새해에도 살림정치, 민생정치를 펼치겠다”고 SNS에 쓴 걸 보면, 탄탄하다는 지역구부터 챙기자고 작심한 것 같다. 끔찍하게 무책임하다. 다시 말하건대, 남 의원의 정치적 성취는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다. 성취가 훼손당하게 내버려 둘 자유가 없다.
한때의 지지자들이, 무엇보다 피해자가 남 의원을 용서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여태 제대로 사과하지 않음으로써 두 번 배반했다. 차마 그의 이름을 박박 지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중의 고통에 빠뜨렸다. 정말로 괴물이 되고 싶지 않다면, 남 의원은 나와서 사죄부터 하라. 이마에 피가 흐를 때까지 고개를 숙이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모든 것을 부디 바로잡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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