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일주일 전 폭설 때도 텅텅 비어있었어요. 갑자기 눈이 내리길래 혹시나 해서 열어봤더니 오늘도 ‘역시나’네요.”
예보에 없던 눈이 쏟아진 지난 12일 오후, 집 앞 골목에 쌓이는 눈을 치우기 위해 제설함을 열어본 시민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기습 폭설로 수도권 전체가 마비된 지 딱 일주일, 제설제가 충분히 채워져 있는 제설함은 손에 꼽았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주민 정모(80)씨는 “눈은 예고 없이 내리는데, 제설제가 미리 채워져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마포구 염리동에서 만난 김모(64)씨 역시 “자비로 미리 구매해두는 것이 낫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겨울철 골목길에 상시 비치되는 ‘제설함’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폭설이 내리는 와중에 제설제는 동나 있고, 불법 투기 쓰레기만 가득하다. 삽, 바가지 등 제설도구는 이미 사라진 경우가 태반이다. 한국일보 뷰엔팀이 지난 12일부터 일주일간 서울 종로, 관악, 용산, 마포, 강서, 은평구 등 17개 지역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을 돌며 제설함 260여 개를 무작위로 열어본 결과, 절반가량이 제설제나 제설 도구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① 제설함, 그게 뭐죠?
서울에는 1만개 이상의 제설함이 설치돼 있다. 제설차 투입이 불가능한 비좁은 이면도로나 골목길, 고지대 주거지역과 같은 취약구간에 설치해 주민들의 ‘자율적인 제설’을 돕는다는 취지다. 보통 겨울을 앞둔 11월에 설치해 3월까지 약 4개월간 유지하는데, 제설함 안에는 염화칼슘이나 모래 같은 제설제와 삽, 바가지 등의 소도구를 넣어둔다.
현행법상 내 집, 내 점포 앞 눈 치우기는 권고가 아닌 ‘법적 의무사항’이다. 하지만 제설함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미비하다. 설치 위치는 물론,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강서구 화곡동 주민 박모(38)씨는 “오며 가며 보긴 봤는데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사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 사용 후 제설함 뚜껑을 활짝 열어두는 바람에 염화칼슘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염화칼슘은 수분과 햇빛이 차단된 공간에 보관해야 본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② 제설함, 도대체 어디에 있죠?
서울시 재난포털 ‘서울안전누리’ 웹사이트에는 각 동네별 제설함의 위치가 지도상에 표시돼 있다. 하지만 지도를 기준으로 찾아가 보니 200여 개 제설함 중 40여 개가 원래의 위치에 없거나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한 구청 관계자는 “제설함 주변에 워낙 쓰레기가 많이 버려지다 보니 철거해달라는 민원이 많이 들어온다”며 “그럴 때마다 철거하고, 매번 위치를 수정하다 보니 지도에 표시된 위치와 어긋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거주 밀집 지역에서 한참 떨어진 공사장 인근이나 대로변 등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원래 취지가 무색해진 경우가 적지 않다. 종로구 명륜동에 거주하는 성모(82)씨는 “언덕길 구석구석에 숨어있어서, 나 같은 노인 여성은 접근하기가 영 쉽지 않다”고 말했다.
③ 제설함, 왜 이렇게 더럽죠?
제설함이 아예 쓰레기통으로 전락해버린 광경도 자주 보였다. 각종 일회용 용기부터 담배 꽁초와 음료수병, 봉지에 든 음식물까지 각양각색의 쓰레기들이 제설함을 차지하고 있었다. 종이 박스 폐기물이 제설함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기도 했다. 쓰레기 처리함과 외관이 유사한 탓인지, 제설함 주변에 종량제 쓰레기 봉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경우도 많았다. 강북구 미아동에서 만난 주민 최모(31)씨는 “제설함이 쓰레기들 사이에 파묻혀 있어서 거기 있는 줄도 몰랐다”며 “솔직히 아무리 급해도,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문제를 인지한 서울시는 지난 2019년 1만여 개 제설함을 일제 점검하고 청소를 실시했다. 특히, 제설함을 쓰레기통으로 오인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 영어와 중국어로 안내된 ‘쓰레기 무단 투기 금지’ 스티커를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역 편차가 심하다. 종로와 중구 지역 내 제설함엔 안내 스티커가 붙어있었지만, 정작 외국인 거주자들의 통행이 잦은 용산구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이태원동에서 만난 파키스탄인 하스마인(25)씨는 “여태껏 쓰레기통인 줄 알았다”며 “지나다니는 다른 외국인들 역시 별생각 없이 제설함에 쓰레기를 버린다”고 전했다.
④ 제설도구, 다 어디로 사라진 거죠?
삽, 바가지 등 제설제를 뿌리는 데 필요한 제설 도구 또한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강북구 도봉동 주민 정승민(67)씨는 “인근 상인들이 도구들을 가져다 쓰고 제자리에 가져다 두질 않아서 목장갑과 종이상자를 대용품으로 넣어두었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오후엔 손으로 제설제를 퍼다 나르는 주민들에게 이웃들이 물로 헹군 라면 용기를 가져다주는 장면도 눈에 띄었다.
용산구 보광동에서 만난 정모(58)씨는 “6일 폭설 때도 당장 쓸 도구가 없어 곤란했다”며 “유사시에 함께 사용하는 물건이니만큼, 모두가 양심을 지켰으면 좋겠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시민 "숫자 줄이더라도 자주 관리해주세요" 지자체 "양심 지켜 사용해주세요"
제설함 관리는 구청과 주민센터에서 맡고 있다. ‘수시로’ 점검한다지만, 사실상 정해진 관리 주기가 없다. 눈 예보가 있을 때마다 그때그때 보충하는 식이다. 예보 없이 기습적으로 폭설이 내리곤 하는 요즘 같은 때엔 더 자주 보충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다. 구청 관계자들은 “제설함 숫자가 너무 많다 보니, 모니터링을 자주 하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이라며 “현재로선 눈이 온 다음 날, 소진 상태를 확인해 3~4일 간격으로 제설제를 채워 넣는 것이 최선”이라고 설명했다.
눈이 내리면 당장 내 집 앞 눈을 치워야 하는 시민들은 "자주 들여다보며 충분히 관리해달라"고 요구한다. 동작구 흑석동에서 만난 건물관리인 장모(65)씨는 “제설함이 너무 많아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수를 좀 줄이더라도 수시로 모니터링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씨는 “정 급할 땐 임시방편으로 모래를 가져다 쓰긴 하지만, 눈을 녹이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움을 완화해주는 수준"이라며 "눈이 오는 즉시 염화칼슘을 뿌려줘야 사고를 미리 방지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필요할 때 '바로' 가져다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얘기다.
제설 업무에 투입된 구청 관계자들은 쓰레기 무단투기와 관련해 ‘시민의식’을 호소했다. 이들은 “악취가 나고 민원이 들어오면, 제설함이 필요한 지역인데도 철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며 “한정된 인력으로 매번 제설함을 돌아보며 쓰레기를 비우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에티켓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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