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한국일보>
몇 해 전 프랑스 샹파뉴에 갔다. 주도인 랭스를 돌아다니다 노트르담 대성당과 마주했다. 파리에 있는 줄 알았던 노트르담 대성당이 랭스에도 있다니! 그 뒤에 알게 된 사실인데, ‘노트르담’은 ‘우리들의 귀부인’이란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고 한다. 노트르담 성당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성당이다.
코로나19 장기화로 답답하던 차에 사진으로나마 웅장하고 화려한 고딕 양식의 랭스대성당을 다시 보니 그날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가이드북은 랭스대성당에서 꼭 봐야 할 세 가지를 언급했다. 성당 입구의 미소 짓는 천사 조각상, 내부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 성당 옆 대주교 관저에 있는 왕의 대관식과 도유식 유물. 이 가운데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역대 프랑스 왕들의 도유식 때 쓰였던 성유병이었다.
도유식이란 대관식 때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예식이다. 성유로 맨 처음 세례를 받았다는 프랑크왕국의 클로비스 1세가 와인의 역사에 등장하기도 하거니와,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이 클로비스 1세의 할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과 결혼해 메로베우스 왕조를 열었다고 묘사한 대목이 떠오른 까닭에 눈길이 성유병에 멈췄다.
한데, 자그마치 왕의 대관식이 왜 수도 파리가 아닌 샹파뉴의 랭스에서 거행됐을까. 이야기는 다시 클로비스 1세 때인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자 갈리아(프랑스) 땅에는 여러 게르만 부족과 서로마 잔존 세력이 왕국을 세워 군웅할거했다. 이들 가운데 클로비스 1세가 이끄는 프랑크족이 단연 돋보였다. 클로비스 1세는 481년 프랑크왕국을 세우고는 가장 먼저 서로마 잔존 세력을 몰아냈다. 지금의 파리, 노르망디, 루아르, 샹파뉴가 위치한 갈리아 북부를 손에 넣더니 파리로 수도를 옮겨 영토 확장을 계속했다.
493년에는 부르군트(부르고뉴)의 공주 클로틸드와 결혼해 부르고뉴를 획득했다. 이내 서고트족과 싸워 아키텐(보르도)을, 알레마니족과 싸워 알자스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곧 지금의 부르고뉴, 루아르, 알자스, 보르도, 샹파뉴에 이르는 유명 와인 산지가 모두 그의 영토가 됐다.
클로비스 1세는 자신이 전쟁에서 연달아 승리하는 이유를 왕비가 믿는 신(예수)의 은총 때문이라 확신했다. 그는 부하 3,000명을 데리고 랭스대성당으로 가서 생레미기우스 대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을 한 천사가 내려와 성유병을 주교에게 건네주었다고 한다. 주교는 성유를 클로비스의 머리에 부었고, 클로비스는 마침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그의 세례식에 사용된 성찬주는 아마도 상파뉴산 와인이었을 것이다.
이후 랭스대성당은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가 됐고, 클로비스 1세에게 사용한 성유는 왕들의 도유식에 등장했다. 1027년 루이1세부터 샤를10세까지 약 1,000년 동안 30명의 프랑스 왕의 즉위식이 이곳에서 거행됐다. 다만, 루이6세와 앙리4세, 나폴레옹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다른 곳에서 대관식을 올렸다고 한다.
프랑스 왕들이 랭스대성당 대관식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다음 사례에서 엿볼 수 있다. 백년 전쟁 당시 잔 다르크는 샤를 7세를 랭스대성당에 데려가 대관식을 올리게 했다. 랭스대성당에서 행하는 대관식이야말로 프랑스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의식이기 때문이었다.
대관식이 열리면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참석해 샹파뉴산 와인을 마시며 연회를 즐겼다. 와인 맛에 감탄한 그들의 입소문으로 샹파뉴는 와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와인 수요가 많아지자 포도밭이 우후죽순 늘어나 그때 이미 지역별로 구분이 생길 정도였다. 특히 12세기부터 상파뉴는 국제적인 규모의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릴 정도로 번성했다. 샹파뉴산 와인은 단연 인기 거래 품목이었다. 당시 샹파뉴 와인은 기포가 없는 스틸 와인이었다. 오늘날 샹파뉴의 대명사인 샴페인(기포가 있는 스파클링 와인)은 18세기부터 생산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귀족들이 마시던 스틸 와인 역시 오늘날과 품종은 다르지만, 샹파뉴 지방에서 여전히 생산된다. 코토 상프누아AOC와 로제 데 리세AOC에서 생산되는 와인이 그것이다.
클로비스 1세의 세례식은 프랑크왕국의 거대한 서막이었다. 더불어 그의 개종은 그리스도교에서 정통으로 인정한 아타나시우스파를 믿는 피지배층을 다스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여타 게르만 왕국의 지배층은 이단으로 규정한 아리우스파를 믿었던 탓에 백성들과 이질적이었다. 결국 이들 게르만 왕국은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클로비스 1세의 프랑크왕국만이 승승장구했다.
클로비스 1세의 개종 외에도 프랑크왕국이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가 또 있다. 역사학자들은 영토를 확장하는 방식에서 답을 찾는다. 바로 근거리부터 영토를 확장했다는 점이다. 모두가 탐내던 지중해 유역의 남부가 아니라, 저 변방 북서부에 나라를 세워 영토를 야금야금 늘렸다고 한다.
한편 클로비스 1세는 법률도 정리했다. 바로 유명한 ‘살리카법’이다. 이 법은 65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는데, 상속법이 특히 유명하다.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 여러 차례 벌어진 왕위 계승 전쟁의 근거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여자 후손에게 왕위를 계승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문제였다. 남자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왕이 사망하면 직계는 아니지만 내가 적통이나 다름없다고 서로 주장하면서, 해당 조항을 각자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탓이다.
이 법은 왕국의 힘을 크게 약화했다. 딸을 제외한 아들들에게 유산을 나누어 물려준다는 조항에 따라 클로비스 1세 사후에 그의 아들들이 왕국을 나눠 물려받자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나라가 쪼개지니 서로 영토 다툼을 벌였고 왕국의 힘은 점차 소진됐다. 자연스레 왕권이 약화하자, 외교를 비롯해 궁 안의 살림을 도맡아 나라 전반을 운영하는 궁재의 실권이 커졌다.
당시 가장 유능한 궁재는 카롤루스 마르텔이었다. 그는 나라의 기틀을 다잡았을 뿐만 아니라 호시탐탐 침범하던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세력과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맞붙어 이겨, 그들을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오죽하면 ‘망치’라는 뜻의 마르텔이란 별칭을 얻었을까.
그의 뒤를 이은 궁재는 그의 아들 페피누스 3세(피핀)였다. 그는 궁재 자리에 만족하지 않았다. 백성의 지지도 받고 있었기에 그는 교황과 모종의 거래를 통해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다. 이윽고 메로베우스 왕조가 무너지고 카롤루스 왕조가 시작된다.
한편 교황은 롬바르드족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동로마 황제가 사사건건 간섭을 해왔다. 결정적으로 우상을 만들지 않는 이슬람교에 자극을 받은 동로마 황제는 교황에게 성화상을 없애라고 지시했다. 그동안 글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성화상을 만들어 포교를 해왔는데 말이다. 이때 페피누스 3세는 교황을 도와 롬바르드족을 물리치고는, 이들에게서 빼앗은 로마 인근의 땅을 교황에게 바친다. 이 땅이 교황령의 시초다. 교황은 새로운 보호자를 만나 이민족의 침입과 동로마 황제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졌고 페피누스 3세는 왕으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페피누스 3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새 왕은 프랑크왕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고 문화를 발전시켜 오늘날 서유럽의 기틀을 마련했다. ‘유럽의 아버지’로 불리며 오늘날까지 칭송받는다. 그의 이름을 딴 상을 마크롱 대통령, 메르켈 총리, 프란치스코 교황 등 여러 지도자가 유럽의 통합과 평화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받았다. 당시 프랑크왕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물론 오스트리아, 스위스, 체코를 아우를 정도여서인지 그의 이름은 여러 언어로 불린다. 그는 바로 카를 대제, 샤를마뉴, 카롤루스 마그누스라고 불리는 카롤루스 대제이다.
카롤루스 대제 역시 교황과 정치적인 거래를 통해 제국을 통치했다. 800년 크리스마스에 교황 레오 3세는 그를 서로마제국 황제로 추대하는 대관식을 거행한다.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을 도와 수도원과 교회를 곳곳에 설립하는 한편, 교회 조직을 최대한 활용했다. 당시 프랑크족은 대부분 글자를 모르는 문맹인 데다 관료제도도 없어, 조직화된 교회를 통하면 통치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문화 군주이기도 한 카롤루스 대제는, 수도원에 보관된 옛 로마의 책과 기록을 모으고 제각각이던 서체를 통일해 필사하게 했다. 요크 주교인 알킨과 같은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해 궁정과 교회와 수도원에 도서관과 학교를 설립하고 라틴어를 가르치는 등 학문을 장려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옛 로마제국의 문화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시대를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정작 카롤루스 대제 본인은 글을 몰랐다고 한다. 평생을 전장에서 지낸 탓이다. 책을 늘 가까이 두고 글자를 깨우치려 노력했지만 끝내 글을 읽을 수 없었다거나, 읽을 수는 있는데 쓰지를 못했다거나, 몇몇 글자만 알았다고 전해진다.
와인 애호가들은 카롤루스 대제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그의 치세 때 포도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해 와인이 부흥기를 맞이했으며 곳곳에 들어선 수많은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뒷날 와인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마을마다 교회를 세우면서 양조시설도 함께 만들어 양조를 지원했다. 세금 일부를 와인으로 받았고, 수도원에 자신의 땅을 기부해 포도 농사를 짓도록 장려했다. 포도 농사를 위한 달력을 만들었고, 위생적인 와인 양조를 위해 칙령을 내릴 정도였다. 더불어 포도재배자들이 만든 와인을 직접 팔 수 있도록 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포도나무를 심으라는 등 농사에도 조예가 깊었을뿐더러 일러준 대로 제대로 하는지 보려고 정기적으로 수도원을 방문했을 정도다.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생산되는 와인에는 ‘코르통 샤를마뉴’가 있다. 바로 그의 이름을 딴 와인이다. 이 와인은 샤를마뉴, 곧 카롤루스 대제가 자신의 길고 하얀 수염을 붉게 물들인 레드와인을 대신해 마신 화이트와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칼럼 ‘샤를마뉴가 필요한 시간’에 썼으니 찾아보시라.)
그러나 제아무리 카롤루스 대제라도 영원할 순 없는 법. 프랑크왕국은 그의 아들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를 끝으로 3개의 나라로 분열되고 말았다. 참고로 루도비쿠스 1세는 2번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아헨대성당에서 한 번, 그로부터 3년 후인 816년 랭스대성당에서 또 한 번!
필자에겐 카롤루스 대제처럼 와인으로 빨갛게 물들일 길고 하얀 수염도 없으니, 오늘은 와인의 역사를 내달리느라 지친 몸을 레드와인으로 적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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