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2019)는 세종(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의 20년 우정을 그렸다. 혼자서도 스크린을 꽉 채울 한석규와 최민식의 만남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예상대로 두 배우의 앙상블은 훌륭했다.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을 훔친 배우는 조말생을 연기한 허준호였다. 세종의 명을 받아 역모를 조사하는 조말생은 얼굴로 말하는 인물이었다. 조말생이 문초하며 낮게 던지는 한마디 “쳐라”에 솜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조말생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따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였다.
끝이 아니었다. 지난해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킹덤2’를 볼 때도 허준호가 눈에 띄었다. 그는 왕세자 창(주지훈)을 도와 세도정치가 조학주(류승룡)의 음모에 맞서는 안현대감을 연기했다. 좀비로 변한 후에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는 모습이 마음을 흔들었다.
영화 ‘결백’(2020)은 또 어떤가. 허준호는 지방 소도시의 야심만만한 시장 추인회를 연기했다. 공직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살인조차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배우 신혜선은 추인회의 죄를 파헤치는 변호사 정인 역할을 맡았는데, “(허준호의) 유들유들하고 비릿한 연기가 무서워 기가 확 죽은 적이 있다”고 했다.
허준호의 매력은 역설적이게도 강인함과 순수다. 영화 ‘모가디슈’를 제작한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는 “고뇌와 삶의 흔적이 있는, 기품 있는 얼굴”이라고 평가했다. 허준호는 ‘모가디슈’에서 1990년대 소말리아 주재 북한 대사를 연기했다.
허준호는 한동안 카메라 앞을 떠나 있었다. 영화 ‘이끼’(2010)를 마지막으로 연기를 쉬었고, ‘뷰티풀 마인드’(2016)로 복귀했다. 연기를 내려놓기 전 허준호의 개인사는 불우했다. 2003년 이혼했고, 2005년 음주운전 사고로 도마에 올랐다. 2007년 그가 제작과 연출을 겸한 뮤지컬 ‘해어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허준호는 연기를 쉬는 동안 목회자가 되려 했다. 기독교에 귀의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노래로 선교 활동에 전념했다.
카메라 앞에 다시 선 허준호는 달랐다. 예전 그는 독하기로 유명한 담배를 하루 2,3갑씩 피웠다. 술 역시 마다하지 않고 마셨다. 기독교 신자가 된 후 술과 담배를 끊었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멀리했다. 운동과 묵상, 시나리오 읽기와 배역 탐구가 그의 일상을 채웠다. 수도사 같은 생활이다. 허준호의 지인은 “촬영 기간 숙소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고 시나리오를 읽으며 끊임없이 배역을 연구한다”며 “연기가 안 좋아질래야 안 좋아질 수가 없다”고 말했다. 강혜정 대표는 “‘모가디슈’ 촬영 때 담배 피우는 장면에선 금연초를 피우고, 회식 자리에선 술 대신 콜라를 마셨다”며 “인간미가 없다 싶을 정도로 자기관리가 무시무시하면서도 선배로서 리더십이 있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성실함은 현장에서 도드라진다. ‘킹덤’ 시리즈의 김성훈 감독은 “허준호 선배는 늘 많은 걸 준비해 오시는 듯했는데 첫 테이크부터 (연기가)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고 했다. 김 감독은 “활을 워낙 잘 쏘셔서 더 많이 쏴 달라고 요청했는데, 촬영을 마치고 보니 손에 상처가 깊게 나 있었다”며 “촬영 중 이를 말하면 연출자가 부담을 갖게 될까 봐 한마디도 안 하셨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허준호의 아버지는 배우 허장강(1925~1975)이다.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성격파 배우다. 외모가 아닌 개성과 연기만으로 관객을 압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이다. 허준호는 대를 이어 성격파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성격파 배우는 영어로 ‘캐릭터 액터(Character Actor)’다. 캐릭터는 고대 그리스어 ‘Charasso’에서 유래했다. ‘Charasso’는 ‘고랑을 깊게 파다, 새기다’는 의미다. 대중 뇌리에 깊게 패일 연기를 선보이는 게 성격파 배우의 운명이다. 이전 연기로 만든 고랑을 메우고, 다음 작품에서 새 골을 파야 살아남는다. 어떤 성격파 배우는 자신이 판 고랑에 안주하다 감초 역할로 전락한다.
허준호는 매 작품마다 새 캐릭터를 새기며 이전 작품에 각인된 이미지를 지워왔다. 자신이라는 원석을 매번 쓸고 쪼고 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 한다. 영화나 드라마는 스타 놀음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 꼭 그렇진 않다. 개성 강한 배우가 짧고 굵직한 면모로 작품에 활력을 부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허준호가 그런 배우다. 그의 연기가 매번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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