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금강의 도시입니다. 금강의 물길은 공주를 지켜줬고, 공주를 다른 지역과 연결해 줬습니다. 하지만 요즘 공주를 말할 때 가장 많이 회자되는 물길은 제민천입니다. 제민천은 공주 시가지 남쪽에 있는 금학동에서 발원해 금강으로 흐르는 길이 4.2㎞, 폭 5m 안팎의 짧고 작은 하천입니다. 제민천은 오랫동안 공주 시민들의 삶 속 깊숙이 들어온 물길이었습니다.
공주의 시가지는 제민천 양편에 들어섰습니다. 공주목 관아, 충청감영 등 고려와 조선시대 주요 관청 건물부터 공주시청, 공주고, 공주여고, 공주의료원 등 공주의 근대를 열었던 주요 시설들이 모두 제민천 주변에 지어졌습니다. 제민천은 아이들이 뛰어놀던 놀이터였고, 아낙들의 빨래터였습니다. 공주에 처음 상수도 시설이 만들어졌을 때, 그 물을 공급해 준 곳도 제민천 상류였습니다. 공주로 유학 온 하숙생들이 자리를 잡은 곳도, 그들이 즐겨 찾던 분식집도 제민천 주변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민천은 점점 잊혀 갔습니다. 큰 시차를 두고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철길을 얻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전국에 철도가 놓이던 1900년대 초반, 경부선과 호남선이 모두 공주를 비껴갔고, 두 철도가 작은 시골마을 대전면에서 만나면서, 충남의 중심은 순식간에 대전으로 옮겨갔습니다. 1932년,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고, 이후 지방법원과 지방검찰청 등 다른 행정기관마저 대전에 자리 잡으면서, 공주가 한때 충남의 중심 도시였다는 사실도 희미해졌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공주 내부에 있었습니다. 1980년대, 금강 너머 논밭이었던 신관동이 신시가지로 개발된 것이지요. 사람과 물자, 상업시설이 제민천변을 떠나 금강을 건너갔습니다. 제민천 주변은 공주의 중심으로서의 힘도 잃어갔습니다. 제민천 주변 원도심은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되었습니다. 제민천도 모기가 들끓고, 악취가 나고, 비가 오지 않으면 흐르지 않는 하천이 됐습니다.
하지만 공주시민들의 삶이 켜켜이 쌓여 있는 제민천을 오염된 상태로 그대로 둘 수는 없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공주 시민들과 공주시는 제민천을 생태하천으로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제민천 주변 하수도를 정비하면서 더러운 물의 유입을 막았습니다. 제민천 상류에 다양한 생물이 살아가는 저류지와 습지, 침전지를 만들어 자연의 방법으로 정화한 물을 제민천에 흘려보냈습니다. 물길 옆에는 산책로가 놓였습니다. 징검다리도 만들고, 예쁜 꽃도 심었습니다. 2014년, 드디어 제민천 생태하천 조성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맑고 깨끗한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자, 물고기가 헤엄치고 새가 날아들었습니다. 사람들도 제민천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멋지고 열정적인 사장님들이 가게를 열었습니다.
폐가로 방치된 구옥의 가치를 알아본 부부는 옛 흔적을 최대한 살려 멋스러운 카페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웃의 카페, 식당과 상생하는 마을 호텔을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도 있었습니다. 토종 곡물을 경험케 하겠다며 듣도 보도 못한 곡물 카페를 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최근 3~4년 사이, 제민천 주변에는 게스트 하우스와 독립 책방, 개성 넘치는 카페, 공방, 갤러리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제민천 주변은 시간이 멈춘 쇠퇴한 원도심에서, 시간의 흔적을 소중히 담아낸 공주의 문화 중심지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공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공산성과 무녕왕릉 같은 박제된 백제의 공주만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제민천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쇠퇴한 원도심과 개성 없는 신시가지만을 찾던 공주 시민들은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신선하고 다양한 문화를 누리게 됐습니다.
자연을 담아낸 작은 하천, 그리고 그 공간을 사랑하는 사장님들이 모여 영원히 침체될 것만 같았던 제민천 주변을 바꿔 놓았습니다. 지금 제민천 주변으로는 원도심 재생의 비법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연과 사람. 변화된 제민천변이 말해주는 뻔하지만 놓치기 쉬운 비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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