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하는엄마들, EBS 프로그램 분석 보고서 발표
"나는 루피, 핑크 레이디. 핑크가 좋아. 핑크 될 거야. 핑크 없으면 못 살아.(루피의 주제곡 '뽀로로 핑크송'에서)"
분홍색 치마를 입은 '핑크 공주' 루피. '뽀통령' 별칭을 얻은 인기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뽀로로)' 속 꼬마 비버다. 뽀로로의 주요 캐릭터 일곱 중 여자는 루피와 패티, 단 둘뿐. 요리 솜씨가 뛰어난 루피는 친구들의 식사를 책임지고, 보라색 치마를 입은 패티는 모든 남자 캐릭터의 관심을 끄는 미소녀 펭귄 설정이다.
왜 늘 여성 캐릭터는 핑크옷을 입을까. 성별 고정관념이 가득한 콘텐츠에 노출되는 우리 아이들, 이대로 괜찮을까.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이 '핑크 노 모어(Pink no more)'를 외치고 나선 연유다.
"아이들은 무엇이든 빠르게 흡수하잖아요. 어릴 때 접한 고정관념이 쭉 가기도 하고요. 그런데 미디어 콘텐츠 속엔 여전히 성별 고정관념과 성편향된 내용이 많아요. 이런 걸 아이들이 보고 자라는 게 큰 문제라고 느꼈죠."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2009년부터 핑크 노 모어 캠페인을 펼쳐온 강미정 공동대표와 남궁수진·박민아 활동가를 지난 3일 서울 대방동 정치하는엄마들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들을 포함한 9명의 엄마들은 지난해 상반기 EBS에서 방영된 유·아동 대상 애니메이션과 스튜디오 프로그램에 대한 '2020 대중매체 성평등 내용분석 보고서'를 지난달 내놓았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의뢰로 진행된 이번 작업은 국내 유·아동 프로그램을 성인지적 관점에서 들여다본 최초의 시도다.
"코로나19로 아이들의 영상 시청이 늘었죠. EBS는 공영방송이고 교육방송이니까 믿고 보여준단 말이에요. 과연 그래도 될지 EBS 콘텐츠를 짚어볼 필요가 생긴 거죠. 막상 들여다보니 이건 정말 아니다 싶더라고요.(남궁수진)"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등장인물의 성비 불균형이었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인데 애니메이션 속 여성 비중은 29.7%에 그쳤다. 뽀로로와 '엄마까투리', '띠띠뽀 띠띠뽀', '꼬마버스 타요' 등 19개 애니메이션의 총 70회차 86개 에피소드를 분석한 결과다. 등장인물의 외모나 특성, 행동에서도 성별 스테레오타입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히어로가 등장하는 '레이디버그'에서조차 주인공 마리네뜨가 부끄러움 많은 소녀로 소개되고, '미니특공대-슈퍼공룡파워'에선 전사로 변신한 후 여성만 두 다리를 모은채 모델 같은 포즈를 취하는 식이다. 하나같이 수줍음 많고 소극적이면서 조신한 모습이다. 노출이 있거나 가슴과 엉덩이가 강조된 몸매로 그려진 경우도 전부 여성 캐릭터였다. '생방송 보니하니', '모여라 딩동댕', '방귀대장 뿡뿡이' 등 스튜디오 프로그램 8편(113회 분량)을 들여다본 결과 역시 비슷했다.
"'출동 슈퍼윙스'를 보면 남자 주인공은 '슈퍼윙스, 이렇게 해보자'라고 주체적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는 반면 여자는 '어떡하지' '슈퍼윙스, 도와줘'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해요. 여전히 남자는 문제를 해결하고, 여자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지요.(박민아)"
아빠가 집안일을 하는 등 긍정적인 변화도 분명 보이지만 단순한 역할 바꾸기에 머무는 건 한계로 지적됐다. 보고서는 성평등이 '어쩌다 한 번'의 시도가 아니라 일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기존 성 통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과 서사의 프로그램이 제작돼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강미정 대표는 "2019년 '보니하니'의 어린이 출연자 폭행 사건을 계기로 EBS가 제작 가이드를 마련했지만 성평등 관련 부분은 여전히 부족한 만큼 좀더 강화해야 한다"며 "제작진 대상 교육과 조직 내 여성 인력도 적극적으로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하는엄마들은 지난해 인형은 여아, 로보트는 남아 등 성별로 장난감을 분류해놓은 7개 대형 온라인 쇼핑몰에 시정 요청을 해 바꾸는 소득을 거뒀다. 분홍=여아용, 파랑=남아용으로만 만든 속옷 등이 원하는 색상의 제품을 선택할 아동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내용의 진정을 국가인권위에도 냈다.
초등돌봄과 아동학대 근절 등을 위해서도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정치하는엄마들은 성평등한 미디어 콘텐츠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거듭 반복되면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그게 자연스럽다고 내면화하기 쉬운 탓이다. "미디어에 다양한 색을, 아이들에게 다양한 삶을." 핑크 노 모어의 슬로건이다. 아이들이 저마다의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볼 권리를 그 누구도 빼앗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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