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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유혹'을 뿌리치는 지도자의 용기

입력
2021.02.07 17: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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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천
오연천울산대 총장

여론에 의한 결정은 정책 실패의 위험
국가재정이 위기 대처의 최후의 보루
'보편적 편익' 중시하는 기재부 존중해야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기획재정부 제공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기획재정부 제공


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3년 3월경, 대통령 민정수석으로부터 면담 요청을 받았다. 그날의 면담 요지는 기획재정부가 관장하는 '정부투자기관 경영평가제도'의 폐지를 노조가 건의해 왔는데, '평가단장을 맡고 있는 오 교수의 생각이 어떤가'였다. 나는 경영평가제도가 우리나라 공기업의 국민경제적 성과를 향상시키는데 상당 수준 기여했고,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에서 이 제도를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답하면서, 역설적으로 "노조가 반대할수록 그 제도의 존재 가치는 명백하지 않겠느냐"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분망한 취임 초에 그렇게 우선순위가 높아 보이지 않는 의제에 대해 의견을 구한 것은 아마도 정권 창출에 기여한 노총지도부의 건의를 중시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했다. 그 뒤로 경영평가제도에 아무 변화가 없었던 것을 보면, 민정수석이 경영평가제도의 존치에 영향을 주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만일 경영평가제도의 존폐에 관해 대상기관인 공기업 구성원들에게 의견을 구한다면 90%가 폐지에 찬성할 것이다. 심지어 해당 공기업을 관장하는 정부 주요 부처의 간부들조차 기획재정부가 '경영평가제도'라는 정책 수단을 통해 사사건건 개입하고 공기업의 자율성을 손상한다면서 은근히 폐지 의견에 동조할 것이 자명하다. 쉽게 말해서, '숫자'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경영평가제도의 폐지로 쉽게 결론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제도적 장치로 인해 부담을 겪게 되는 수요자들을 대상으로 존폐 여부를 묻는 과정은 항상 '보편적 이익의 상실'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최근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손실보상제, 이익공유제의 도입과 관련하여 여권마저 기획재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양상은 표와 선거에 집착하는 '정책 포퓰리즘'의 위험을 품고 있다. "기재부가 주인인 나라냐?"고 힐난한 어느 정치권 인사야말로 자원 배분의 최적화에 매진해야 하는 예산당국의 책무를 간과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국가 재정 운영의 책임부서가 '다수의 편익을 가져오지만 보편적 공통이익은 적은 지출항목(소위,선심성 예산)의 신설'을 주도하거나 정치적 눈치 보기식 태도를 보인다면 '나라의 금고지기'라는 본연의 권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설령 여권이 선호하는 신규 사업이라고 하더라도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충족하지 않음을 근거로 반대 또는 보류의 입장을 견지하는 기획재정부의 입장을 존중하거나 최소한 진지한 설득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원숙한 경세가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다.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지시에도 "그것은 안 됩니다"라는 입장을 펼칠 수 있는 예산실장이 자리를 지킨다면 예기치 못한 대내외적 경제 위기 발생 시 국가 재정이 위기 극복을 위한 최후의 보루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90년대 말 외환위기 사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사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온다고 해서, 장기적 관점에서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가 나온다고 말할 수 없다. 다수의 이해당사자들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새로운 사업에 지지를 보내는 것은 자명하다. 다만 그러한 사업들이 보편적 가치 증대에 기여하는 것인지,국가의 필수적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그리고 그러한 사업 추진에 소요되는 비용의 조달이 용이한 것인지를 판단하여 도입 여부를 냉철히 결정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고, 모범 답안이 정해진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비용(세금)을 능가하는 '사회적 편익'이 창출되는지를 주도면밀하게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고, 추가적 세부담을 짊어지게 될 담세자들의 공감을 도모할 때,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정책 실패'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오연천 울산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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