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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삶이 끝난다는 것을 수용하는 긴 투쟁이다

입력
2021.02.10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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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날짜

편집자주

독창적 문체로 남성 패션지 ‘GQ’를 18년간 이끌어온 이충걸 전 GQ 편집장이 문화 현상의 이면을 새롭게 들춰 봅니다. 현재 서울 필동에 사는 이 전 편집장의 ‘멘션(mentionㆍ촌평)’은 격주 수요일자 <한국일보> 에 실립니다

인간은 누구도 심각하게 자기가 불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인간은 누구도 심각하게 자기가 불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티이미지뱅크

1월 17일 아침 9시. 엄마가 전화를 했다.

“너 여기 좀 와 봐.”

그날은 일찍 깼지만 창 밖 공기에 어둑하게 푸른 빛이 섞여 있어서 내내 새벽인 줄 알았다.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엄마가 찾으면 침대에서 몸을 떼어내는 축이었다. 같이 보내는 아침이 무한하지 않으니까. 오직 그날 따라 모호하게 차분한 목소리만이 무서웠다. 그리고 엄마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살아서 죽어 있는 꿈을 꾼 줄 알았다. 엄마는 방 한 가운데 앉았는데, 분홍색 스웨터 전체가 피로 젖어 있었다. 왼쪽 머리에 댄 수건도 이미 새빨간데, 손가락 사이사이로 피가 흘렀다. 방 바닥에는 피로 적셔진 수건들이 나뒹굴고, 이불도 베개도, 방안의 모든 것이 피로 덮였다. 지금 혹시 피의 둑이 터진 전쟁 영화 속에 들어온 걸까. 엄마는 가지의 빈틈없는 보라색 얼굴과 터질 것 같이 부푼 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탄성이 내 입으로 말려들었다. “세상에…!” 깨끗한 수건을 다시 머리에 대는 순간, 4㎝ 길이로 패인 상처에서 유정(油井)처럼 피가 뿜었다. 등과 손, 어깨의 자상은 보는 것만으로 사지가 뒤틀렸다. 나는 떨었다. 이것이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될까 봐.

나의 하드웨어 문제(설치가 제대로 안 됨)와 소프트웨어 문제(불안의 로직 프로그램을 돌림)가 짝을 지어 나를 난자했다. 피 속에 내던져진 엄마의 신체는 내 존재의 좌표를 뭉개 버리고, 멍청함은 나의 언어가 되었다. 지각이 떨어져 나가자 어떤 의미론 진공의 중립 상태가 되었다. 사람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 피가 많이 날까? 그런데 어디로 가지? 이 동네 내과, 치과에서도 피 흘리는 환자를 볼까?

“가만 있으면 괜찮아져.”

엄마는 늘 그런 식. 그러나 별 일 아닌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엄마는 유리병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팔에 힘이 없어 핸드 레일을 놓쳤고, 그대로 계단 아래 처박혔다고 했다. 주방에서 찬 물을 받으러 광속으로 내려가는데, 직각의 피가 흘러내리는 계단참에 화분이 산산조각 나 있고, 쏟긴 흙엔 피가 퍼부어졌으며, 흩어진 유리 조각들은 그 비참함에 합세하고 있었다. 피로 미끌거리는 난간을 잡고 올라오는데 저 상태에서 어떻게 당신 방으로 기어 올라가 나에게 전화를 했는지, 어떻게 목소리는 그렇게 차분했는지, 화염 같은 질문이 불타올랐다.

삶은 삶이 끝난다는 것을 수용하는 긴 투쟁이다. 표면적으로 우리는 모두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닳고 닳은 숙명론이 아니더라도 누구도 심각하게 자기가 불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 내장된 것은 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 잠재의식 표면의 잔물결은 매일 형태를 바꾸며 엄마의 소멸과 싸웠다.

위급할 땐 119라는 일반 상식 따윈 있지도 않았다. 지갑을 챙기며 생각한 게 겨우 콜 택시라니. (그날 이후 마음 속에서 공명하는 100만 개의 복화술사는 순서를 바꾸며 영원히 나를 조롱했다) 그 와중에 내비게이션이 교란돼 집을 못 찾겠다던 택시가 집 앞에 왔다. 나는 엄마 스웨터를 갈아 입히려고 했다. 택시는 그들의 작은 회사인데 누가 거기 피를 묻히고 싶을까. 촌음을 다툴 때 끼어드는 매너를 누가 칭찬해줄까. 피의 스웨터를 벗기고 초록색 스웨터를 갈아 입히는데 세월로 기워진 몸, 가슴이 만드는 눈물의 골짜기 사이로 다시 한 움큼 피가 흘렀다

엄마는 계단을 내려가지 못했다. 그 위에 엎어진 채 태아처럼 웅크리곤 큰 소리를 질렀다. 즉각적인 외침과 내부를 가르는 고함 중 하나는 엄마의 것인데, 나머지는 누구의 것일까. 나는 엄마 등을 쓸며 “조금만, 조금만 참고 내려 가자…” 정없이 종용했다. 기진맥진 계단을 내려 와선 택시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피를 많이 흘려요.” 택시는 버스 전용 차선으로 위반하며 동네에서 가장 큰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렸다. 택시 안에서 엄마를 감싸고 손을 잡았는데 피가 빠져나간 몸은 얼음 속보다 차가웠다.

응급실 앞에서 엄마는 피가 채 닦이지 않은 얼굴로 비틀거렸다. 레지던트는 한 달 내내 혼난 것 같은 얼굴로 상처를 보자고 했다. “여기서요?” 그 자는 오버랩으로 되물었다. “그럼 어디서요?” 그 순간, 내 눈동자 색깔이 바뀌었다. “도대체 어떤 교육을 받으면 그 따위로 말을 해?” (사람들은 의사 집단이 바쁘기 때문에 품위 없는 거라고 그들 대신 변명하지만, 환자들은 한가해서 병원에 가는 게 아니다) 상처 부위 봉합과 파상풍 주사와 머리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손을 팔짱 낀 안쪽에 쑤셔 넣은 채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문이 여닫힐 때마다 바람은 차가운 면도날이 되어 엉겨 붙은 죄책감 사이로 파고들었다. 문득 급하게 매고 나온 알록달록 머플러가 세상에서 가장 천덕스러워 보일 때, 내 청바지에 다량의 피가 얼룩덜룩 응혈돼 있다는 걸 알았다.

이 집을 3층으로 설계하면서부터 계단이 언젠가 엄마에게 허들이 될 거라는 주변 이야기가 많았다. 알고는 있었다. 위험은 현실의 대응 관계와 상관없이 인생의 전제 조건이니까. 그러나 ‘언젠가’는 당장의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급격히 줄어드는 엄마의 삶과 엎질러진 내 삶을 바라보았다. 1층에 주방과 엄마 방을 배치할 걸.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걸. 계단 높이를 더 낮출 걸. 그 아파트에 그냥 살 걸. 나는 이 집을 부수고 나를 같이 매장하고 싶었다. 비통함이 예방 원칙을 호소하는 구약의 예레미아보다 더 하다 해도 가책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후회. 벽에 바른 도배지처럼 시들할 따름이었다.

엄마는 평형을 잃은 구토증 때문에 오후 내내 응급실 베드에 누워 있었다. 내출혈은 없었다. 의사는 집에 가도 된다면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보이면 바로 응급실로 오라고 했다. 뭐라고? 그 무식한 레지던트와 간호사를 다시 보라고?

저녁에 집에 왔지만 (영원히 재기만 하고 결코 계약하지 않는) 협상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무서웠다. 나는 약을 챙겨드리고 엄마를 주무시게 했다. 잠은 몸과 맘을 병을 매만지는 무언의 치료사. 그리고 한 시간마다 불 꺼진 방에 들어가 엄마를 체크했다. 호흡은 괜찮은지, 통증은 어떤지, 발가락이 말리지 않는지, 갑작스런 발작이 있는지. 옆을 지키다가 서재로 올라와 마감이 코앞인 글을 쓰다가 다시 내려와 누웠다.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천국에 가도 나에겐 의자 말고 아무 것도 없을걸. 술을 마셔서 실존적 공포감을 흐릿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일몰 같이 검붉은 밤은 그 안에 열흘을 담아도 남을 만큼 길었다.

다음날 아침, 엄마는 부어서 떠지지 않는 팬더 곰 눈으로 계속 진통제를 찾았다. 십 수년 전에도 엄마는 양손 가득 비닐 봉지를 들고 오다 구두 굽이 배수구 덮개에 끼는 바람에 무방비로 넘어진 적이 있었다. 나는 눈 주위가 멍으로 테를 그린 엄마를 보며 “하하하, 엄마가 판다가 됐네”하며 슬프게 놀렸는데 이번엔 유머의 남은 공간이 없었다.

피 묻은 옷을 빨려면 미리 피를 빼내야 한다고 들었다. 욕조만 한 스테인리스 대야에 엄마 옷과, 수건, 이불과 베개 커버까지 죄다 담았는데 아무리 헹구어도 핏물이 차 올랐다. 피의 강물을 배수구에 쏟을 때마다 묵시록이 눈앞에 보였다. 엄마는 추가로 쓸 에너지가 없었다. 진통제는 진작에 용량 초과인 데다 등 전체에 틈 없이 파스를 붙여 꼭 파스 빛깔 내복 같았다. 나는 불완전한 세계에 태어난 불완전한 내 처지 때문에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니 원래의 나로 돌아갈 것도 없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무엇을 못 견뎌서일까. 게티이미지뱅크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무엇을 못 견뎌서일까. 게티이미지뱅크

어렸을 땐, 교회 십자가 상 앞을 지나며 예수의 고통을 덜어줄 구두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야고보도 울고 갈 마음으로 바랐지만 이젠 다 식은 동화가 되었다. 이제 엄마는 시간의 끝에 서 있고, 내 마음은 씻겨 없어졌으니 이후의 삶은 갈수록 나빠질 것이다.

20일후의 아침 9시는 안전한 항구로 명명된 가족 시간대가 되었다. 양갱처럼 까맣던 멍도 흐려지고, 통증도 얼핏 나아졌다. 오후 2시 반, 숨이 너무 차 뽀얀 공기 감촉도 못 느끼던 엄마가 공원에서 조금 걷겠다고 했다. 그 몸에 팬 흠집은 그대로이고, 불안은 다 쓸려가지 않았는데.

나는 조금 후 내 방에 올라와 공원 어디쯤 엄마가 있는지 둘러보았다. 그때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주방으로 내려가는데 엄마가 식탁 의자에 앉아 힘없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이리 와 봐… 어지러워…”

엄마 머리에 참외를 반 잘라놓은 크기의 혹이 나 있었다. 너무나 커서 차라리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연이은 타격에 싱크대를 붙잡고 목이 꺾인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곧바로 20일 전 자행했던 두 개의 실수를 바로잡았다. 나는 즉시 119에 전화를 하고, 지난 번 그 망할 병원 말고 한남동에 있는 다른 병원 응급실로 갔다.

날씨가 조금 눅어 있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무엇을 못 견뎌서일까. 다가오는 모든 소리가 무음으로 들렸다. 고요가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쳐 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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